프론티어의 설계자: PC방에서 호텔 제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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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8

경쟁점의 소문

2026. 10. 20. · 5,599자 · 공백 포함

경쟁점의 소문

아크릴 간판의 나사가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윤도현은 의자 위에 올라가 드라이버를 돌리다가 손을 멈췄다. 골목 건너편 전봇대에 붙은 전단 한 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출장 수리 전문] [당일 완벽 해결] [불필요한 부품 교체를 하지 않습니다]

문구만 보면 평범한 광고였다. 그러나 맨 아래, 굵은 매직으로 덧쓴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장부를 보여 주는 곳은 조심하세요. 초보 수리공이 부품값을 부풀린답니다.’

도현은 의자에서 내려와 전단을 떼었다. 종이는 얇았고, 풀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누가 붙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종이를 접어 장부 사이에 끼웠다. 바로 반박 전단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부터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리공의 장부 / 2000년대 초 어느 화요일] - 확인 시각: 오전 8시 17분 - 발견 장소: 가게 맞은편 전봇대 - 내용: 부품값 부풀리기 의혹, 초보 수리공이라는 표현 - 확인된 사실: 없음 - 추정: 경쟁점 홍보물일 가능성 - 즉시 행동: 고객 자료와 영업 기록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음

장부를 덮자 전화벨이 울렸다. 전날 사진관에서 수리를 맡겼던 손님이었다.

“사장님, 어제 청구서가 다른 데보다 비싸다는 말을 들었어요. 혹시 정말 새 부품을 쓴 게 맞습니까?”

도현은 먼저 상대가 불안해하는 숨을 들었다.

“청구서에 적힌 부품은 전원 케이블 하나입니다. 사진관 컴퓨터 본체 부품은 교체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시면 작업 전후 기록을 직접 보셔도 됩니다.”

“기록까지 있습니까?”

“작업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적었습니다. 손님 파일 이름이나 사진 내용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부를 펼쳐 부품표와 점검표의 항목을 읽어 주었다. 전원 연결 상태, 환기구의 먼지, 케이블 접촉, 시험 부팅 시간. 손님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괜히 의심했네요.”

“의심하셔도 됩니다. 비용을 내는 분이 확인하는 건 당연합니다. 다만 제가 가진 기록으로 판단해 주세요.”

통화를 마친 뒤 도현은 가슴 안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문은 한 번의 거짓말이 아니라, 확인하지 않은 문장이 사람 사이를 건너가는 방식으로 퍼졌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소문이 사실처럼 굳을 수 있었다. 반대로 감정적으로 반박하면 손님들의 이름과 사연까지 끌려나올 수 있었다.

점심 무렵 김태식이 부품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도현은 전단을 내밀었다.

“이런 게 붙었습니다.”

김태식은 안경을 코끝까지 내렸다.

“경쟁점이 생겼다는 뜻이지. 네가 잘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잘하고 있다는 말로 넘기기엔 고객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럼 가격표를 크게 붙여. 원가, 작업비, 보증 기간. 숨길 게 없으면 숨길 필요도 없지.”

“원가를 전부 공개하는 게 맞을까요?”

“모든 거래처 단가를 공개하라는 뜻은 아니야. 손님이 선택할 수 있는 정보와 거래처를 지켜야 하는 정보는 다르지. 네 장부가 그 경계를 알려 줘야 해.”

도현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세 줄을 적었다.

1. 확인된 원인과 추정을 구분한다. 2. 안전하지 않은 작업은 서두르지 않는다. 3. 기록으로 약속을 지킨다.

김태식은 세 번째 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건 간판보다 오래 가겠네.”

오후 세 시, 오상민이 가게에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활기차게 인사하지 않았다. 손에는 도현이 만든 점검표 사본이 들려 있었다.

“도현 씨, 잠깐 이야기합시다.”

“무슨 일입니까?”

“플레이존에서 들었는데, 당신이 여섯 대를 전부 교체하라고 했다더군요.”

도현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내가 들은 얘기를 다시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당신이 장부를 보여 주면서도 실제 부품값은 숨긴다고 하더군요.”

말끝에 의심이 묻어 있었다. 도현은 대꾸하기 전에 장부를 펼쳤다. 그러나 고객 이름이 적힌 페이지는 그대로 덮어 두었다.

“플레이존 여섯 대 중 교체가 필요한 건 한 대였습니다. 한 대는 접촉 불량이라 부품을 쓰지 않았고, 나머지는 전원 환경을 확인한 뒤 사용 중지와 청소를 권했습니다. 비용은 이 두 줄뿐입니다.”

도현은 빈 양식에 숫자와 항목만 옮겨 적었다. 상호명, 좌석 번호, 손님 이름은 쓰지 않았다.

오상민은 종이를 받아 읽었다.

“그런데 왜 내가 들은 얘기와 다르죠?”

“저도 모릅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은 저도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당신이 실력을 좋게 보이려고 문제를 부풀린 건 아닙니까?”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도현은 손가락을 장부 모서리에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업 전 기록과 작업 후 기록을 비교하시면 됩니다. 교체하지 않은 부품은 반납했고, 사진도 찍지 않았습니다. 손님 자료는 확인 범위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안 봤다고 어떻게 증명하죠?”

“증명할 수 있는 건 제가 남긴 절차입니다. 믿어 달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오상민은 대답하지 않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 벽에는 ‘사용한 부품만 청구합니다’라는 종이와 함께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고객 확인 안내] - 작업 전 예상 비용을 설명합니다. - 원인이 달라지면 작업을 멈추고 다시 동의를 받습니다. - 복구가 어려운 자료는 가능성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 작업 기록은 고객이 원할 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본체와 부속품은 접수 때 함께 확인합니다.

오상민은 안내문을 읽고 피식 웃었다.

“이걸 다 지키면 일 느려지지 않습니까?”

“느려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럼 경쟁점이 당일 수리를 내세우면요?”

“안전하지 않은 당일 수리는 받지 않습니다.”

“장사하기 참 어렵겠네요.”

“그래도 오래 설명할 수 있는 쪽을 택하려고 합니다.”

오상민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의심이 풀린 표정은 아니었지만, 처음 들어왔을 때의 확신은 사라져 있었다.

그날 저녁, 플레이존의 김성호가 가게로 찾아왔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미안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직원에게 ‘여기는 전부 갈아야 한다더라’고 말했습니다. 직원이 다른 수리점에 물어봤고, 그 말이 또 옆 가게로 넘어간 모양입니다.”

도현은 성호에게 차를 내밀었다.

“사장님이 들은 말을 확인하려고 저한테 물어보신 건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확인되지 않은 말이 비용과 실력에 대한 판정처럼 굳어졌다는 겁니다.”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사실을 적어도 될까요? 여섯 대 중 한 대만 부품을 교체했고, 나머지는 환경 점검을 했다고요.”

“어디에 어떻게 적으실지는 사장님이 결정하셔야 합니다. 다만 좌석 번호나 직원 이름은 빼 주세요.”

“알겠습니다.”

도현은 그 자리에서 확인서 양식을 만들었다.

[작업 사실 확인서] 의뢰처: 고객이 직접 기재 작업 범위: 고객과 합의한 항목만 부품 사용: 실제 사용분만 확인되지 않은 주장: 사실로 기재하지 않음 개인정보: 작업에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기록하지 않음

성호가 서명한 뒤, 도현도 옆에 서명했다. 종이 한 장이 소문을 없애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사람이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는 알려 줄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질 때 오상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현 씨, 아까 그 전단 말입니다. 내가 붙인 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단정한 적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게 직원이 경쟁점에서 받은 비교표를 가져왔어요. 거기에 당신 가게는 ‘초보, 장부만 길고 수리는 느림’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비교표가 있습니까?”

“보여 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공개하면 또 다른 소문이 됩니다.”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공개하지 마세요. 대신 비교표의 항목을 사실과 의견으로 나눠 보죠. 틀린 사실만 표시하고, 의견에는 대응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오상민의 PC방 사무실에서 비교표를 펼쳤다. ‘당일 완벽 해결’은 검증할 수 없는 홍보 문구였다. ‘부품 교체율이 높다’는 항목은 표본과 기간이 없었다. ‘고객 자료를 보관한다’는 문장은 도현의 접수 원칙과 정반대였지만, 그 근거가 적혀 있지 않았다.

오상민은 연필로 한 줄씩 지웠다.

“내가 이런 표를 받으면 우리 직원들이 믿을 줄 알았는데, 숫자가 하나도 없네요.”

“숫자가 있어도 기준이 없으면 또 다른 소문이 됩니다.”

“그럼 기준을 만들자는 겁니까?”

도현은 전날 적어 둔 세 줄을 보여 주었다.

“정직한 견적, 안전한 운영, 기록하는 책임. 경쟁점이든 협력점이든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오상민은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그는 시장 1위가 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1위의 기준을 적어 본 적은 없었다. 빨리 고쳐 주는 것, 싸게 해 주는 것, 손님을 많이 받는 것. 그 세 가지 모두 중요했지만, 하나라도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비용을 숨기게 만든다면 오래 갈 수 없었다.

“도현 씨.”

“네.”

“이번 주말에 우리 매장 두 곳에서 동시에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한 곳은 전원 배선이고, 다른 한 곳은 냉각 문제예요. 우리 직원만으로는 점검 시간이 부족합니다.”

도현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경쟁점에 일을 맡기겠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확인된 범위 안에서 함께 처리해 보자는 겁니다. 고객 동의서와 비용 기준은 당신 방식대로 하고, 우리 직원이 옆에서 배우게 하죠. 서로 고장 기록을 공유하되 손님 정보는 분리하고요.”

소문을 만든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대의 가게에서, 경쟁자가 협업을 제안하고 있었다.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협업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

“두 매장의 운영자와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맡는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설명하는지, 작업을 중단할 조건은 무엇인지 문서로 정합시다.”

오상민은 웃었다.

“역시 장부부터군요.”

“장부가 없으면 협업이 아니라 부탁이 됩니다.”

김태식은 두 사람이 만든 초안을 보고 부품 보증과 반납 조건을 덧붙였다. 사용하지 않은 부품은 청구하지 않을 것, 안전 점검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영업보다 조치를 먼저 할 것, 직원 교육 시간은 작업 시간으로 인정할 것. 오상민은 처음엔 비용이 늘어난다며 난색을 보였지만, 결국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임시 협업 기록 / 1차] - 목적: 두 PC방의 전원·냉각 환경 점검 - 범위: 합의된 두 매장, 지정된 장비 - 비용: 사용 부품과 실제 작업 시간 기준 - 책임: 각 매장 운영자에게 결과 설명 - 금지: 고객 개인정보와 무관한 자료 열람 - 중단: 안전 위험 발견 시 즉시 영업 중지 후 조치 - 재검토: 작업 종료 뒤 기록을 함께 확인

도현은 마지막 줄 아래에 세 원칙을 다시 썼다.

정직한 견적. 안전한 운영. 기록하는 책임.

가게 문을 닫을 무렵, 전날 떼어 둔 전단이 장부 사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도현은 종이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뒷면을 펼쳤다. 그리고 연필로 짧게 적었다.

‘소문은 말로 지우지 않는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작게 만든다.’

밖에서는 오상민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경쟁자의 차를 배웅하며 도현은 아직 자신이 이긴 것도, 평판을 완전히 지킨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다음번 누군가가 “그 가게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감정 대신 장부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두 매장의 점검을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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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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