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너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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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6

통역은 업무가 아니다

2026. 10. 20. · 6,208자 · 공백 포함

통역은 업무가 아니다

팁 봉투가 발견된 다음 날, 솔바람 힐스의 아침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나린은 탈의실 거울 앞에서 이름표를 달았다. 작은 글씨로 적힌 이름은 여전히 ‘나리 차이’였다. 강미숙 매니저가 새 이름표를 주문했다고 했지만, 물건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 이름표를 써야 했다.

말리는 옆 사물함 문을 닫으며 봉투를 흔들었다.

“오늘은 잃어버리지 말고 가슴에 붙이고 다닐까?”

“그러면 팁 봉투가 아니라 장식이 되잖아.”

“여기서는 장식도 기록해야 할지 몰라.”

둘은 웃었지만,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어제 창고 상자 안쪽에서 발견된 ‘외국인 별도’라는 표식은 아직 아무도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박상철 팀장은 임시 표기였다고 했고, 운영팀 직원은 누가 언제 적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모른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나린은 더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때 복도에서 이혜진 홍보팀장이 뛰어왔다.

“나린 씨, 오늘 오전에 중요한 손님이 오는데 도와줄 수 있죠?”

“캐디 배정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배정 말고 통역이요. 태국에서 온 여행사 관계자들이라서요.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나린은 잠시 말리와 눈을 마주쳤다.

“통역은 제 업무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혜진은 손에 든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국제 고객을 유치하는 기간이라 서로 도와야죠. 그리고 나린 씨가 제일 잘하잖아요.”

“그러면 통역 시간도 근무 기록에 남습니까?”

“그 정도는 협조로 봐야죠. 오늘 한 번만 부탁할게요.”

한 번만이라는 말은 현장에서 자주 여러 번의 시작이었다. 나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국인 직원이 통역을 하면 ‘친절한 도움’이 되고, 한국인 직원이 같은 일을 하면 ‘전문 업무’가 되는 곳이었다.

“어떤 내용을 통역합니까?”

“리조트 소개, 객실과 골프 패키지, 코스 투어요. 사진도 찍을 겁니다.”

“사진도요?”

“국제화 홍보 자료에 넣을 예정이에요. 나린 씨가 직접 안내하면 훨씬 자연스럽잖아요.”

나린은 혜진의 말 속에서 통역과 홍보와 캐디 업무가 한꺼번에 섞이는 것을 느꼈다.

“근무표와 보상 기준을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혜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나린 씨, 지금 손님들이 오고 있어요. 이런 건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나중에 이야기하면 기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리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혜진은 대답 대신 박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분 뒤 박 팀장이 나타났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통역 몇 시간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려운 게 아니라, 업무인지 협조인지 구분하고 싶습니다.”

“팀워크를 모르는군요.”

“팀워크라면 업무를 누가 맡고 어떻게 인정하는지도 함께 정해야 합니다.”

박 팀장은 나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린 씨밖에 없잖아요. 손님 앞에서 거절할 겁니까?”

“공식적인 요청과 기록이 있으면 하겠습니다.”

“지금 그걸 요구할 상황이 아니에요.”

“그럼 오늘은 통역을 맡지 않겠습니다.”

복도 안의 공기가 순간 차가워졌다. 혜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고, 박 팀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이면 평가표에 협조성 부족이라고 적힐 수도 있어요.”

“평가 항목과 업무 요청을 바꾸지는 말아 주세요.”

나린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말할수록 자신의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윤도하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검은 셔츠에 운영기획 이사 명찰을 달고 있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어제 운영회의에서 팁 정산표와 보관 절차를 올린 뒤, 아버지 윤태호 회장에게서 ‘현장을 너무 흔든다’는 전화를 받은 탓이었다.

도하는 박 팀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통역 요청은 근무표에 있습니까?”

“이사님까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홍보팀의 단기 협조입니다.”

“단기 협조라면 왜 평가표를 언급했습니까?”

박 팀장은 잠시 말을 잃었다.

도하는 혜진에게 물었다.

“통역과 촬영을 맡길 때 보상 기준, 촬영 동의, 사용 기간을 안내했습니까?”

혜진은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홍보 자료니까 회사가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직원의 얼굴과 목소리가 들어가면 별도 동의가 필요합니다. 통역 내용이 홍보 문구로 편집되는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이사님, 너무 원칙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원칙이 없으면 나중에 누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린은 도하를 바라보다가 금세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장면은 고마우면서도 불편했다. 어제까지는 회장 아들의 말 한마디가 규정처럼 작동했고, 오늘도 그가 끼어들자 박 팀장의 태도가 달라졌다. 나린은 도하의 도움과 자신의 권리를 혼동하고 싶지 않았다.

“도하 이사님.”

“네.”

“제가 통역을 거절하는 이유를 대신 설명하지 마세요.”

도하의 눈이 흔들렸다.

“대신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말할 수 있습니다. 통역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업무와 조건을 먼저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도하는 잠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직접 말씀하세요.”

나린은 혜진에게 정중히 말했다.

“통역이 필요하면 요청서를 작성해 주세요. 어떤 시간에, 어떤 업무를,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적고, 근무 시간과 추가 수당, 촬영 동의 여부를 확인하겠습니다. 그 후에 제가 맡을지 결정하겠습니다.”

혜진은 난처한 얼굴로 박 팀장을 보았다. 박 팀장은 더 이상 협조성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오늘 손님은 어떻게 합니까?”

“공식 통역을 맡을 담당자를 찾으셔야 합니다.”

“그럼 행사가 망가질 수도 있어요.”

“그 책임까지 제 개인 업무로 넘기지는 말아 주세요.”

말리는 나린의 팔꿈치를 살짝 건드렸다. 잘했다는 뜻인지, 너무 위험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오전, 태국 여행사 관계자 세 명이 리조트에 도착했다. 혜진은 급히 외부 통역업체에 연락했지만, 첫 미팅 시간까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도하는 회의실 예약을 미루고, 간단한 영어 안내 자료를 준비했다. 나린은 회의실 밖에서 자신의 근무표에 적힌 시간만 확인했다. 그녀는 통역을 맡지 않았지만, 태국 손님들이 골프 코스에서 불편을 겪지 않도록 기본 인사말과 안전 안내를 종이에 적어 두었다.

‘공식 통역이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안전 정보만 전달한다.’

나린은 그 문장을 혜진에게 건넸다.

“이건 업무 요청이 아니라 안전 안내입니다. 손님이 길을 잃거나 위험 구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필요한 내용만 말하겠습니다. 통역과 홍보 업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혜진은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선을 그어야 해요?”

“선을 그어야 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 손님은 나린이 알려 준 안내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태국어로 천천히 설명했다.

“비가 온 뒤에는 8번 홀 옆 경사가 미끄럽습니다. 카트는 지정된 길로만 이동해 주세요. 문제가 생기면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짧은 안내가 끝나자 한 손님이 태국어로 물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오래 일했나요?”

나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코스의 비탈길은 꽤 잘 압니다.”

그 말은 통역이라기보다 동료로서의 안내에 가까웠다. 손님들은 고맙다고 인사했고, 혜진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

“나린 씨, 잠깐만요. 이쪽을 보면서 다시 말해 줄래요? ‘솔바람 힐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촬영 동의서가 먼저입니다.”

“이건 그냥 기록용이에요.”

“기록용이라도 사용 목적은 확인해야 합니다.”

혜진은 카메라를 내렸다. 도하는 회의실 문가에 서 있었지만, 이번에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나린은 그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점심시간, 강미숙은 인사팀 작은 회의실로 나린과 말리를 불렀다. 책상 위에는 새로운 양식이 놓여 있었다.

[추가 업무 요청서] - 요청 부서: - 요청 일시와 예상 시간: - 업무 내용: - 필요한 언어·기술: - 근무 기록 반영 여부: - 추가 수당 또는 대체 휴무: - 촬영·녹음 여부와 사용 기간: - 담당자 서명:

미숙은 양식을 나린 쪽으로 밀었다.

“오늘 일 때문에 만든 겁니까?”

“오늘 일만 때문은 아니에요. 팁 정산과 숙소 배정 문제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외국인 직원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 일들이 실제로는 반복 업무였다는 기록이 필요해요.”

말리가 양식의 마지막 줄을 읽었다.

“담당자 서명. 이제 부탁한 사람 이름도 남는 거네.”

“네. 부탁이 업무가 되는 순간 책임자가 생겨야 합니다.”

미숙은 나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통역을 거절한 건 잘못이 아니에요. 다만 앞으로는 혼자 거절하지 말고, 이 양식을 같이 제출하세요. 개인의 용기만으로 버티는 구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나린은 그 말을 듣고 수첩을 펼쳤다.

‘참는 생존자에서, 함께 기록하는 사람으로.’

아직 그 문장을 쓸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혜진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출력한 서류를 들고 있었다.

“나린 씨, 오전 요청을 정식으로 다시 드릴게요. 태국어 통역 두 시간, 국제 고객 안내 자료 검토 한 시간입니다. 촬영은 하지 않습니다. 추가 수당은 인사팀 기준에 따르고, 근무표에도 반영하겠습니다.”

나린은 서류를 읽으며 질문했다.

“자료 검토는 어떤 범위입니까?”

“태국어 표현이 자연스러운지 확인해 주세요. 내용의 사실관계와 운영 약속은 홍보팀이 책임집니다.”

“그 조건이라면 맡겠습니다. 다만 틀린 내용을 발견하면 수정 의견을 기록하겠습니다.”

“알겠어요.”

혜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나린 씨, 오늘 처음엔 제가 너무 쉽게 부탁했어요. 국제화라는 말을 앞세우면 다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누군가의 시간이 들어간다는 걸 잊었습니다.”

나린은 그녀의 사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과는 기록과 함께 있을 때 오래 남는다고 배웠다.

“요청서에 남아 있으니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저녁 무렵 도하는 코스 사무실 앞에서 나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통역 업무, 정식으로 반영됐습니다.”

“봤습니다.”

“제가 요청한 건 아닙니다. 미숙 매니저와 혜진 팀장이 함께 만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생겼다. 바람이 그린 위의 깃발을 흔들었다.

“아침에 제가 대신 말하려고 했던 것, 미안합니다.”

“도하 이사님이 멈춘 건 다행이었습니다.”

“멈추는 것도 배워야 하더군요.”

“회장 아들이라서 잘하는 일도 있겠죠.”

“예를 들면요?”

“사람들이 말을 멈추게 하는 일.”

도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제가 말할 때 기다려 주세요.”

“약속하겠습니다.”

나린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오늘 회의실에서 제 안전 안내를 들은 태국 손님들이, 제가 여기서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직은 배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왜 아직입니까?”

나린은 골프장 쪽을 바라보았다. 저녁 햇빛이 8번 홀 능선을 붉게 물들였다.

“일을 잘하는 것과, 존중받으며 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둘 다 지켜질 때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둘을 같이 지키도록 하죠.”

나린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말은 많았고, 그 말들이 배정표와 정산표와 요청서에 실제로 남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밤, 나린은 휴대전화에 도착한 근무표를 확인했다. 통역 세 시간과 코스 안내 두 시간이 별도 항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도 정확했다.

나린 차이야.

그 아래에는 새로운 표시가 하나 있었다.

‘추가 업무 승인: 강미숙.’

나린은 이름표를 손끝으로 만졌다. 종이 한 장이 차별을 끝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공짜로 가져갈 때, 이제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말리는 침대에서 물었다.

“오늘 통역했어?”

“응. 그런데 통역은 업무가 아니야.”

“그럼 뭐야?”

나린은 잠시 생각한 뒤 웃었다.

“업무가 되려면, 먼저 업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거지.”

창밖에서 골프장 조명이 하나씩 꺼졌다. 나린은 수첩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것과, 나의 일을 존중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내일 아침 그녀는 다시 코스로 나갈 것이다. 바람과 잔디와 회원들의 표정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또 ‘잠깐만 도와 달라’고 말한다면, 먼저 요청서를 내밀 것이다.

· · ·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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