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화면
아버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태준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 창고 셔터를 절반쯤 올릴 때 나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창고에 남아 있을 때마다 셔터를 완전히 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도 싫었고, 안쪽에 쌓인 물건들이 밖으로 보이는 것도 싫어했다.
“아버지, 지금 어디예요?”
“창고.”
“왜 거기 있어요?”
“네가 물어볼 줄 알았다.”
태준은 손에 쥔 휴대전화를 바꿔 잡았다. 화면에는 조금 전까지 300만 원이 ‘입금 예정’이라고 떠 있었다. 이제는 ‘입금 완료’로 바뀌었다. 돈은 계좌에 들어왔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은 비어 있었다. 숫자만 정확했고,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돈, 아버지가 보낸 거예요?”
침묵이 길어졌다.
“일단 창고로 와라.”
“무슨 돈인지 말해 줘야 가죠.”
“전화로는 안 된다.”
“아버지.”
“태준아. 그 돈 건드리지 마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겁을 먹었을 때 내는 목소리라는 것을 태준은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창고에 불이 났던 날도 그랬다.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모든 단어를 짧게 잘랐다. 소화기, 물러서, 신고. 그날 이후 태준은 아버지가 침착할수록 상황이 나쁘다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 갈게요.”
“혼자 와.”
“왜요?”
“그냥 와.”
통화가 끊겼다. 태준은 한동안 빈 화면을 바라봤다.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전화를 걸면 아버지는 더 닫힐 것이고, 그러면 태준은 아무것도 듣지 못할 터였다.
그는 외투를 걸쳤다.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고, 거실 식탁 위에는 병원 봉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태준은 봉투 옆에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300만 원을 봤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판단할 수 없는 돈은 가족에게 가장 늦게 알려야 했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진 서울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지 않은 비였지만 도로의 불빛을 번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태준은 택시를 잡아타고 주소를 말했다. 기사에게는 오래된 창고 단지라고만 했다.
창고 단지는 외곽 도로 뒤편에 있었다. 낮에는 트럭과 지게차가 오갔지만, 밤에는 주차된 차들의 윤곽만 보였다. 태준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펴지 않았다. 비를 맞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세 번째 줄 끝에 있는 17번 창고의 셔터가 반쯤 올라가 있었다.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전등처럼 노랗지 않았다. 오래 켜 둔 모니터의 푸른빛이었다.
“아버지.”
안에서 의자가 끌렸다. 강만석이 셔터를 조금 더 올렸다.
“빨리 들어와.”
태준은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회계 장부와 폐기된 포장 상자, 오래된 단말기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작업대 위에 노트북 한 대를 펼쳐 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검은 바탕 위로 숫자와 시간이 줄지어 떠 있었다. 종목명도, 회사명도 없었다. 날짜와 시각, 금액, 그리고 짧은 기호만 반복됐다.
태준은 화면 앞에 서자마자 숨을 멈췄다.
“이거 뭐예요?”
“나도 다 아는 건 아니다.”
“아버지가 만든 거 아니에요?”
“내가 만든 건 장부다. 저건 누군가 장부를 흉내 낸 거고.”
아버지는 노트북을 닫으려다가 멈췄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검은 칩 모양의 작은 아이콘이 있었다. 1화에서 보았던 메신저 이미지와 같았다. 은색 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었다.
태준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새벽의 장부 대화방을 열었다. 상단 이미지와 모니터의 아이콘을 나란히 놓자 두 선의 각도가 정확히 겹쳤다.
“이거 아버지 창고에 있던 거죠?”
“그걸 어디서 봤어?”
“방금 들어간 대화방에서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아래에서 낡은 철제 상자를 꺼냈다. 자물쇠는 잠겨 있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영수증 뭉치와 오래된 통장 사본, 명함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맨 위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조각이 놓여 있었다. 태준은 그것을 보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작은 칩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명함 크기의 카드에서 잘라낸 일부였다. 한쪽 면에는 은색 선이 있었고, 다른 면에는 숫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2008-11-17.
“이게 뭔데요?”
“그날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무슨 문제요?”
아버지는 철제 상자 안의 서류를 한 장씩 넘겼다. 오래된 종이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났다. 어떤 명세표에는 같은 금액이 여러 계좌로 나뉘어 있었고, 어떤 장부에는 입금자 이름 대신 세 자리 코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숫자를 해석해 주지 않았다. 지금의 태준은 그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아버지는 모르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예전에 한 리서치 회사에서 회계를 맡았다.”
“증권사였어요?”
“겉으로는 리서치 회사였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정보를 사고파는 곳에 가까웠지.”
“불법이었어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버지는 창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공개된 자료를 정리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료가 발표되기 전에 움직였고, 사람들은 그 움직임을 따라 돈을 넣었다.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손해를 본 사람들은 늘 자기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무도 구조를 의심하지 않았다.”
태준은 화면을 다시 보았다. 검은 화면의 숫자들은 시장의 가격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사람들의 선택을 시간표로 적어 놓은 것 같았다.
“300만 원도 그거예요?”
아버지는 눈을 들었다.
“누가 보냈는지 확인했어?”
“이름이 없어요. 입금 예정이었다가 방금 완료로 바뀌었어요.”
“그럼 더 위험하다.”
“아버지가 보낸 게 아니면 누가 왜 나한테 돈을 보내요?”
“돈을 보내는 이유는 두 가지다. 갚으라고 보내거나, 움직이라고 보내거나.”
“저를 움직인다고요?”
“네가 숫자를 읽는다는 걸 누군가 알고 있는 거다.”
태준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지 못했다. 재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정 없이 숫자 보는 사람. 그 문장이 칭찬이 아니라 표식이었다면, 재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을 어느 명단에 올려 둔 셈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새벽의 장부 대화방에 새 메시지가 올라왔다.
— 첫 입금 확인.
태준은 화면을 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메시지는 몇 초 뒤 사라졌다. 캡처할 틈도 없었다. 대신 다른 문장이 남았다.
—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검은 화면을 열 것.
“검은 화면이 뭔데요?”
아버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열지 마.”
“뭘요?”
“어떤 링크도, 어떤 파일도 열지 마라. 네가 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네가 뭘 모르는지 확인한다.”
태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이미 한 번 확인당한 사람처럼 말했다. 2008년의 날짜가 적힌 카드 조각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뭘 했어요?”
“나가려고 했다.”
“그냥 나간 게 아니죠?”
아버지는 철제 상자 맨 아래에서 접힌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봉투에는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었다. 종이 가장자리에는 물에 젖었다 마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장부 원본을 들고 나가려던 날, 네가 학교에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체육관에서 어지러워 쓰러졌고 아버지가 병원에 늦게 도착했다. 그날 아버지는 계속 전화를 받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태준은 그 말을 믿었다. 가족의 사정은 아이가 묻기 전에 어른들이 접어 버리는 종이와 같았다.
“그때 나 때문에…”
“네 탓이 아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말하면 네가 그쪽을 찾을까 봐.”
아버지는 접힌 편지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너를 찾았구나.”
창고 바깥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셔터 틈으로 헤드라이트가 길게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차는 멈추지 않았지만, 태준은 누군가 창고 앞을 천천히 확인하고 간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검은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태준은 모니터가 꺼진 뒤에도 숫자가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집에 가서 그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마라.”
“돌려주지도 말고요?”
“혼자 결정하지 마.”
“그럼 어떻게 해요?”
“은행에 문의할 때도 네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전부 말하지 마라. 확인되지 않은 이름을 적으면, 그 이름이 네 기록에 남는다.”
태준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말은 조심하라는 조언이었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오랫동안 기록을 두려워해 왔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준은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전화 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 돈 확인했지? 오전에 네가 할 일은 간단해. 화면만 보고 판단하면 돼.
태준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화면만 보고 판단한다는 말은 1화에서 본 문장과 달랐다. 숫자는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사람을 움직인다. 이제 그는 그 문장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운영 규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여덟 시가 조금 넘어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아직 자고 있었다. 태준은 방 안에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알림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서윤아’라는 이름이었다.
— 강태준 씨, 300만 원은 수익이 아닙니다.
태준은 손을 멈췄다. 그 이름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메시지는 이어졌다.
— 오전 9시 30분에 검은 화면이 열리면, 손실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그 전에 아버지 창고의 17번 서랍을 확인하세요.
태준은 즉시 아버지에게 전화하려 했다. 그러나 발신 버튼을 누르기 전에 새 메시지가 하나 더 떴다.
— 그리고 재혁에게는 이 메시지를 보여주지 마세요.
그 순간 노트북 화면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검은 화면 한가운데에 숫자 하나가 떠올랐다.
3000000.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 이 돈의 주인을 찾으면, 당신의 아버지가 왜 침묵했는지도 알게 됩니다.
태준은 화면을 닫지 못했다. 아홉 시 삼십 분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그는 아버지 창고 17번 서랍의 열쇠를 찾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거실에서 어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기 전에, 태준의 화면에 마지막 알림이 도착했다.
— 첫 번째 승률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