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는 법
잃는 법
계좌에 300만 원이 들어온 뒤, 강태준은 그 돈을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숫자는 화면 안에서 조용히 빛났고, 어머니의 병원비와 밀린 월세를 생각할 때마다 그 숫자는 더 선명해졌다. 쓰지 않은 돈은 때로 사용한 돈보다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아침 7시 42분, 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태준 씨 맞습니까? 은하은행 거래관리팀입니다.”
“네.”
“고객님 계좌에서 출처 확인이 필요한 입금이 발생했습니다. 확인 전까지 일부 거래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태준은 창고 작업대에 놓인 노트를 바라봤다. 어젯밤 적은 기록이 그대로였다.
[사실] - 입금 시각: 2018년 늦가을 21시 12분 - 금액: 3,000,000원 - 발신자: 확인 중 - 사용 여부: 없음 - 이체 여부: 없음 - 상담 요청: 금융복지 상담실, 한도경 조사관
[추정] - 피해자 환불 대기금일 가능성 - 과거 M-17 기록과 연관 가능성 - 재혁이 계좌를 중간 통로로 사용했을 가능성
[조치] - 돈을 인출하지 않음 - 거래관리팀 연락 기록 보존 - 추가 지시를 문자로 받지 않음
“거래 제한은 언제 풀립니까?”
“출처 확인과 소명 절차가 끝나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가까운 지점에 방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태준은 잠시 망설였다. 은행에 가면 아버지가 알게 될 수도 있고, 조직이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은 이제 믿을 수 없었다.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민재혁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은행에서 전화 왔지? — 네가 먼저 연락했어? — 그 돈은 네 돈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보관하고 있다는 기록은 네 책임이야. — 그래서? — 오늘 밤까지 다른 계좌로 옮겨. 내가 방법을 알려 줄게.
태준은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답장을 쓰지 않았다. 잠시 뒤 재혁이 다시 보냈다.
— 옮기지 않으면 계좌가 묶이는 건 시작일 뿐이야. — 네 가족 계좌도 확인할 수 있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태준의 손이 굳었다. 어머니의 병원비, 아버지의 창고, 집 앞에 세워진 회색 승용차가 차례로 떠올랐다. 돈을 옮기면 가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선택은 돈의 출처를 숨기는 일이 될 가능성이 컸다. 무서움은 항상 가장 빠른 해결책의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태준은 메시지를 캡처하고 노트에 시간을 적었다.
[추가 기록] - 오전 7시 51분, 민재혁이 계좌 이동 요구 - 가족 계좌 확인 가능성 언급 - 확인되지 않은 협박성 문장 - 조치: 송금하지 않음, 답장하지 않음
아버지 강만석은 창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태준이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은 것을 보았다.
“재혁이냐?”
“네.”
“뭐라고 하더냐.”
“돈을 옮기라고 합니다.”
만석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창고 안쪽 선반에서 낡은 공구함을 꺼냈다. 공구함 바닥에는 오래된 영수증 뭉치가 들어 있었다.
“내가 예전에 잘못한 건 돈을 훔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태준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럼 뭐였어요?”
“돈이 어디서 왔는지 알면서도, 숫자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한 것.”
만석은 영수증 몇 장을 책상 위에 펼쳤다. 금액과 날짜만 남은 복사본이었다. 발신자와 수취인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부족한 돈을 다음 계정에 붙였어. 나중에는 그 계정이 누구 돈인지도 모르겠더라. 그때마다 ‘이번 달만 넘기자’고 했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어요?”
“모두가 잃었지. 그런데 잃는 사람이 한꺼번에 나타나지 않았어. 오늘은 한 사람, 내일은 다른 사람. 숫자가 사람보다 먼저 움직이니까 책임도 나눠진 것처럼 보였어.”
태준은 300만 원이 든 계좌 화면을 떠올렸다. 숫자가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방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왜 그때 멈추지 않았어요?”
“멈추면 나만 잃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도 저는 같은 생각을 해요. 제가 돈을 안 쓰면 어머니 병원비를 잃어요. 옮기지 않으면 가족을 잃을 수도 있고.”
만석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잃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무슨 뜻이에요?”
“무엇을 잃을지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남이 정해 준 것을 잃게 된다.”
태준은 그 말이 위로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처음으로 ‘돈을 지키는 법’이 아니라 ‘돈을 포기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오후 두 시, 은하은행 지점의 작은 상담실에서 거래관리팀 직원이 서류를 설명했다.
“이 금액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확인됐습니다. 다만 입금 경로와 거래 목적을 소명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직접 받은 대가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있습니까?”
태준은 노트와 캡처 파일을 꺼냈다. 그는 최미라의 이름을 무단으로 공개하지 않도록 필요한 부분만 가렸다. 계좌번호와 개인 연락처는 검은색으로 지웠고, 자신이 확인한 시간과 대화 내용만 남겼다.
직원이 자료를 훑어보았다.
“이 대화방에 참여하셨습니까?”
“초대받았지만, 돈을 옮기거나 투자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왜 나가시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태준은 잠시 멈췄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기에는 대화방을 계속 지켜본 시간이 길었다. 돈을 거절하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본 순간도 있었다.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했습니다.”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기록을 이어 갔다.
“그 부분도 사실대로 적겠습니다.”
상담실을 나설 때 은행 직원은 거래가 제한될 수 있고, 공식 확인이 끝날 때까지 해당 금액을 임의로 이동하지 말라고 재차 안내했다. 태준은 그 문장을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었다.
[은행 안내] - 거래 목적과 입금 경로 확인 필요 - 소명 절차 진행 - 확인 전 자금 이동 금지 - 관련 대화 및 자료 보존
밖으로 나오자 한도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행에 다녀오셨습니까?”
“네.”
“자료를 받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다만 지금부터는 혼자 조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진 돈 때문에 가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돈을 움직이면 그 위협이 줄어들까요?”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선택이 아니라 반응입니다. 지금은 기록과 공식 절차를 유지해야 합니다.”
태준은 길 건너편의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얼굴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조사관님, 저는 그 돈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까?”
“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고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럼 제가 너무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닙니까?”
도경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잃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의 손실에 기대는 순간, 그 돈은 이미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손실을 막는 것과 손실을 떠넘기는 것은 다릅니다.”
통화를 끊은 뒤 태준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샀지만, 뚜껑을 따지 못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재혁의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찍혀 있었다.
저녁 무렵 태준은 어머니의 병원에 들렀다. 병실의 창가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태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너 또 돈 때문에 잠을 못 잤구나.”
“아니에요.”
“거짓말할 때 오른쪽 눈썹이 먼저 올라가.”
태준은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엄마, 만약에 내가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있는데도 안 쓰면, 그게 바보 같은 걸까요?”
어머니는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 돈이 네 돈이니?”
“아마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럼 쓰지 마.”
“병원비가 밀릴 수도 있어요.”
“병원비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 남의 돈을 쓰고 나서 평생 네가 그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
태준은 어머니에게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대신 병원비 납부 기한을 확인하고, 사회복지 상담 창구에 분할 납부를 문의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없다고 해서 네가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잘못된 돈을 안 쓰는 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날 밤 태준은 집으로 돌아와 새 장부를 펼쳤다. 그는 300만 원 옆에 ‘손실 가능’이라는 문장을 적었다.
[손실 기록 / 2018년 늦가을] - 사용할 수 있지만 사용하지 않음 - 돌려받을 수 있지만 보장되지 않음 - 지키고 싶지만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음 - 잃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공식 절차를 유지함
문장을 쓰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더 무거워졌다. 돈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때 서윤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행에 갔다고 들었어요.”
“누가 말했습니까?”
“당신 계좌는 이미 여러 사람이 보고 있어요. 은행만이 아니라, 그 계좌를 통과시킨 사람들도요.”
“재혁이 알려 줬습니까?”
“재혁은 당신을 설득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가 가진 선택지는 많지 않아요.”
“윤아 씨는요? 선택지가 있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저도 잃은 게 많아요. 한때는 다른 사람에게 잃게 만들면서 제 몫을 챙겼고요.”
“그래서 저한테 잃는 법을 가르치려는 겁니까?”
“아니요. 잃은 뒤에 무엇을 기록할지 말하려는 겁니다.”
윤아는 태준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오래된 장부의 한 페이지였다. 숫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이루고 있었고, 오른쪽 여백에는 같은 표식이 반복됐다.
M-17. M-17. M-17.
맨 아래에는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반환 불가 시 다음 계정으로 이월.’
태준은 화면을 확대했다. 장부는 과거의 기록처럼 보였지만, 종이 가장자리에는 최근에 찍힌 스테이플 자국이 있었다.
“이게 언제 자료입니까?”
“정확한 날짜는 모릅니다. 다만 같은 문장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어디서요?”
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새벽, 한도경 조사관에게 원본을 넘길 겁니다. 그 전에 당신이 결정해야 해요.”
“무엇을요?”
“계속 돈을 지키려고 할지, 아니면 돈이 사라질 가능성까지 기록할지.”
통화가 끝난 뒤, 태준은 창고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윤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만석은 눈을 감았다.
“무슨 자료더냐.”
“‘반환 불가 시 다음 계정으로 이월’이라는 문장이 적힌 장부요.”
아버지의 손이 떨렸다.
“그 문장은 내가 처음 쓴 게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 필체와 비슷합니다.”
“숫자를 맞추라는 지시를 옮겨 적었을 뿐이야.”
“누가 지시했는데요?”
만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고 안 냉장고 모터가 낮게 울렸다. 침묵은 때로 이름보다 정확한 대답이었다.
태준은 아버지 앞에 장부를 놓았다.
“내일 이 자료를 조사관에게 넘길 겁니다.”
“그러면 너도 조사받을 수 있다.”
“이미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돈을 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태준은 장부에 적힌 300만 원을 바라봤다.
“아니요. 돈을 놓아야 남는 것도 있어요.”
“뭐가 남는데?”
“제가 어디까지 알고도 모른 척했는지, 어디서 멈췄는지, 누구의 돈을 대신 쓰지 않았는지요.”
만석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서랍에서 낡은 볼펜 하나를 꺼내 태준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적어라. 잉크가 잘 안 나와서 중간중간 끊길 거다.”
태준은 볼펜을 받아 노트의 마지막 줄에 적었다.
‘잃는 법: 내 손에서 사라지는 돈과, 남의 손으로 보내는 돈을 구분할 것.’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민재혁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 네가 돈을 포기하면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아. — 내일 아침이면 네 아버지 이름이 공개될 거야. — 지금이라도 내 말을 들어.
태준은 이번에는 답장을 보냈다.
— 내가 잃어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기록하고 감당하겠다. —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는 않겠다.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창고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태준은 문틈으로 골목을 바라봤다. 회색 승용차가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차 번호는 보이지 않았지만, 태준은 더 이상 그것을 확인하려고 뛰어나가지 않았다.
그는 노트와 장부를 봉투에 넣고 봉투 겉면에 적었다.
[한도경 조사관 전달 예정] - 계좌 입금 및 거래 제한 기록 - 최미라 관련 자료 중 필요한 부분 - M-17 표식과 2008년 장부 사본 - 재혁의 자금 이동 요구 메시지 - 본인의 미사용 및 미이체 확인
그리고 마지막 줄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수익으로 계산하지 않은 300만 원.’
새벽 1시 13분, 노트북 화면이 스스로 켜졌다. 검은 창의 가운데에 숫자 하나가 나타났다.
0%.
그 아래에 문장이 떴다.
— 손실을 받아들일 가능성.
태준은 커서를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은 잠시 후 다시 바뀌었다.
— 다음 선택은 당신의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창고 위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태준은 봉투를 가슴에 품고 계단을 올려다봤다. 아버지는 아직 아래에 있었다. 집에는 그와 아버지, 어머니뿐이었다.
그런데 위층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태준은 돈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가장 위험한 것은 돈을 잃는 일이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내미는 일이었다.
그는 불을 끄지 않은 채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