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너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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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3

회장 아들의 현장 점검

2026. 10. 15. · 5,645자 · 공백 포함

3화. 회장 아들의 현장 점검

다음 날 아침, 솔바람 힐스의 하늘은 전날보다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비가 온 뒤라 잔디 사이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혔고, 카트 도로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나린은 출근 카드를 찍은 뒤 배정표 앞에 섰다.

“나린 씨, 오늘은 서코스 삼 번 조예요. 오전 두 팀, 오후 한 팀.”

말리 수완나가 배정표에서 손가락을 떼며 말했다. 말리의 손끝에는 형광펜으로 표시한 흔적이 있었다. 외국인 캐디들의 이름 옆에는 작은 점이 찍혀 있었고, 한국인 캐디들의 이름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나린은 알고 있었다. 전날 사고 보고서에 이름을 적은 사람, 회원 민원에 걸린 사람, 그리고 아직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은 ‘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오늘도 점이 있네.”

나린이 작게 말하자 말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점이 있으면 손님이 덜 까다로운 조에 넣어 주는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다.”

나린은 배정표를 다시 읽었다. 오전 첫 팀은 예약 메모에 ‘초보 두 명, 안전 안내 우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두 번째 팀에는 ‘해외 방문객 포함’이라고 되어 있었다. 메모는 구체적인 것 같았지만, 누구의 기준으로 적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날 첫 티오프에서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손님이 자신의 출신을 이유로 말을 끊었고, 박상철 팀장은 사과부터 요구했다. 윤도하는 뒤늦게 안전 수칙이 맞았다고 확인했다. 그 뒤 강미숙 과장은 나린에게 날짜와 시간을 적으라고 했다.

나린은 작은 수첩을 꺼냈다.

8시 10분. 서코스 대기실. 배정표에 ‘주의 관찰 대상’ 표시 확인.

문장을 적고 펜을 덮으려는 순간, 배정표 아래에서 누군가의 손이 움직였다. 검은색 점퍼 소매, 반듯하게 접힌 서류철, 현장에서 보기 드문 새 운동화. 남자는 배정표의 이름과 조 편성을 하나씩 대조하고 있었다. 직원용 명찰에는 ‘윤도하’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나린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전날 그는 운영기획실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회원 앞에서는 말끔한 셔츠 차림이었다. 오늘은 카트 정비 직원처럼 보일 만큼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보는 순간 전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전 안내를 따르지 않은 건 회원 쪽입니다.

나린은 한 걸음 물러섰다. 윤도하는 배정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나린 씨, 오늘 서코스 첫 팀 맡으시죠?”

“네.”

“예약 메모에 안전 안내 우선이라고 되어 있는데, 팀 구성은 확인하셨어요?”

“확인했습니다. 초보 두 분이 포함돼 있고, 오후에는 해외 방문객이 있습니다.”

“그럼 출발 전에 어떤 순서로 안내할 건가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질문은 시험지 같았다. 나린은 그가 이미 답을 알고서 묻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트 승하차와 정차 위치를 먼저 안내하고, 티잉 구역에서는 앞 팀 간격을 확인한 뒤 샷 순서를 설명할 겁니다. 공이 휘어질 가능성이 있으면 손님이 기다려야 하는 지점도 알려 드리고요.”

“좋네요. 혹시 어제처럼 손님이 안내를 따르지 않으면요?”

나린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제처럼’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겹쳐 있었다. 자신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뜻인지, 회원이 무시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 일이 이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게 될 거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은 기준으로 다시 안내합니다. 그래도 위험하면 진행을 멈추고 기록합니다.”

“기록까지요?”

“기록이 있어야 다음 사람이 같은 상황을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윤도하의 손가락이 서류철 가장자리를 두 번 두드렸다. 그는 잠시 배정표를 보았다. ‘주의 관찰 대상’이라는 표시는 전날과 똑같이 나린의 이름 옆에 남아 있었다.

“그 표시는 누가 붙였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오늘부터는 표시에 담당자와 사유를 함께 남기겠습니다.”

나린은 웃지 않았다. 제도가 달라지는 말은 언제나 쉽게 나왔다. 문제는 누가 언제 그 말을 책임질지였다.

“그럼 제 이름 옆에 적힌 사유는 뭔가요?”

윤도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박상철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실장님, 아침부터 직접 점검하십니까?”

상철은 서류철을 보자 걸음을 늦췄다. 윤도하는 고개를 돌렸다.

“네. 배정 기준과 현장 안내가 일치하는지 보려고요.”

“현장 직원들한테는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어제 민원 건도 있고요.”

“그래서 더 보려고 합니다.”

상철의 시선이 나린에게 닿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괜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은 분명했다. 나린은 수첩을 손에 쥐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나린 씨, 첫 팀 출발 준비하셔야죠.”

상철이 말했다.

“네. 다만 배정표 표시의 사유와 담당자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상철의 입꼬리가 굳었다.

“그건 운영팀 내부 사항입니다. 일일 배정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어요.”

“제 근무 평가와 연결된 표시라면, 제가 알아야 하는 내용 아닌가요?”

대기실 안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다른 캐디 두 명이 카트 키를 찾는 척 고개를 숙였다. 말리는 조용히 나린의 옆에 섰다. 편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이미 답이었다.

윤도하가 서류철을 닫았다.

“맞습니다. 직원이 자기 평가와 배정에 영향을 주는 기록을 볼 수 없다면, 그 기록은 관리가 아니라 통제가 됩니다.”

상철이 낮게 웃었다.

“윤 실장님이 현장 사정을 너무 이상적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손님들은 예민하고, 팀장은 매일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과 근거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건 다른 문제죠.”

윤도하는 배정표 한 장을 떼어 들었다. 종이 아래쪽에는 인쇄된 작은 칸이 있었다. ‘특이사항’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 칸은 공란이었다. 그는 펜을 꺼내 ‘표시 사유: 전일 회원 민원 관련, 안전 안내 확인 필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썼다.

나린은 그 글씨를 보며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명확한 기록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윤도하가 나타난 뒤에야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같은 내용이 자신이나 말리의 요청만으로도 적혔을까.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됐습니까?”

윤도하가 물었다.

“아직요.”

나린은 배정표를 가리켰다.

“왜 제 이름만 확인 대상입니까? 어제 안전 안내를 무시한 건 회원이었는데요.”

상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회원 민원이 들어왔으니 상황을 살피는 겁니다. 외국인 캐디들은 의사소통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말리가 숨을 삼켰다. 나린은 말을 끊지 않았다. 상철이 자기 말의 끝을 스스로 듣게 하고 싶었다.

윤도하의 표정이 굳었다.

“그 표현은 기록에 남기지 않겠습니다. 대신 실제 문제가 무엇인지 적죠. 언어 문제가 아니라, 안전 안내를 누가 따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안내가 전달됐는지.”

상철은 입을 다물었다.

나린은 배정표의 다른 칸을 가리켰다.

“그럼 해외 방문객 포함이라는 메모도 바꿔 주세요. 국적이 특이사항의 전부가 되면 안 됩니다. 한국어 안내가 필요한지, 영어 안내가 필요한지처럼 업무에 필요한 정보로 적어야 합니다.”

윤도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 옆의 표시가 오늘만의 확인인지, 앞으로 계속 남는 건지도 알려 주세요.”

“오늘 회의에서 기준을 정하고, 정해진 내용은 공지하겠습니다.”

나린은 그제야 조금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안심한 것은 아니었다. 공지는 종이에 남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종이에 잘 남지 않았다.

첫 팀이 도착했다. 초보 손님 두 명은 카트에서 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린은 평소보다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안전 수칙을 설명했다. 손님 중 한 명이 “한국말 잘하시네요”라고 말했다. 칭찬처럼 들리지만, 나린은 그 말 뒤에 따라올 수 있는 기대를 알고 있었다. 외국인인데도 잘한다는 말은 잘하지 못할 때의 책임을 미리 정해 두는 말이기도 했다.

“한국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안전 규칙은 국적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같습니다.”

나린은 부드럽게 말했다.

윤도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와주려 들지 않았다. 대신 메모를 했다. 나린은 그 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의 눈앞에서 대신 해결하는 것보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기록하는 일이 지금은 더 필요했다.

첫 홀을 마친 뒤 나린은 카트를 세우고 수첩에 시간을 적었다. 출발 전 안내 8시 22분. 승하차 위치 설명 완료. 손님 질문 2회. 위험 상황 없음.

말리가 옆에서 물었다.

“저 사람, 정말 운영기획실 윤도하 맞아?”

“모르겠어. 명찰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

“어제 직원들이 회장님 아들이라고 하던데.”

나린의 손이 멈췄다.

“회장님 아들?”

“소문이야. 정확한 건 아니고.”

그때 윤도하가 카트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수첩에 닿았지만, 내용을 보려 하지는 않았다.

“잠깐 말씀드려도 될까요?”

나린은 수첩을 덮었다.

“네.”

“저는 윤도하입니다. 운영기획실장이고, 윤태호 회장의 아들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직접 들으니 공기가 달라졌다. 나린은 그가 왜 지금까지 이름만 적힌 명찰을 달고 있었는지, 왜 배정표 앞에서 평범한 직원처럼 서 있었는지 생각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현장을 보신 건가요?”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 먼저 직원들이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저도 시험한 겁니까?”

윤도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확인해야 할 건 시스템이지, 특정 직원의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나린은 그의 사과를 받아 적을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사과는 기록으로 남겨 주세요.”

“네.”

“그리고 회장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제 말이 더 빨리 반영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한 내용이 맞는지, 다른 캐디들도 같은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윤도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로만 말고요.”

“공식 회의록과 배정 기준 개정안으로 남기겠습니다.”

그 순간 멀리서 상철 팀장이 손짓했다. 다음 팀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나린은 카트 시동을 걸었다. 윤도하는 뒤로 물러섰다.

“나린 씨.”

그가 다시 불렀다.

“네.”

“어제 일, 회원 민원으로만 정리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나린은 그 말을 듣고도 곧장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첩을 펼쳐 한 줄을 적었다.

9시 47분. 윤도하 운영기획실장, 회장 아들임을 밝힘. 배정 표시 기준과 안전 안내 기록의 공식화를 약속함. 이행 여부 확인 필요.

말리가 그 문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는 사람도 회의록처럼 기록하네.”

“사람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약속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거야.”

두 사람은 다음 티잉 구역으로 향했다. 하늘은 다시 흐려졌고, 멀리 산등성이에는 비가 올 때 생기는 푸른 안개가 걸려 있었다. 나린은 카트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누군가의 아들이 현장에 내려왔다고 해서 골프장이 하루아침에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배정표에는 처음으로 표시의 사유와 담당자의 이름이 남았다.

그 작은 칸 하나가 앞으로 누구의 편에 서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린은 수첩을 가방 안쪽에 넣고 앞을 보았다. 다음 팀의 공이 떨어질 곳, 바람의 방향, 말리의 카트가 따라오는 거리까지 하나씩 확인했다. 현장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기록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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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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