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증
4화. 출입증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었지만, 화면 한가운데에 남은 지도 표시는 지워지지 않았다.
강태준은 지도를 확대했다. 서울 외곽의 오래된 상업지구, 낮에는 창고와 사무실이 섞여 있고 밤에는 간판 불빛이 유난히 오래 남는 곳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건물은 ‘청람비즈센터’라는 이름의 회색 건물이었다. 1층에는 문을 닫은 세탁소가 있었고, 지하에는 주차장 입구가 있었다.
태준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경찰이나 금융기관에 먼저 문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에 남은 정보는 지도 하나와 최미라라는 이름, 그리고 M-17이라는 표기뿐이었다. 그것만 들고 찾아가면 오히려 증거를 훼손할 수도 있었다.
그는 집을 나서기 전 종이 한 장에 적었다.
[확인할 것] 장소: 청람비즈센터 목적: 출입구와 공용 공간 확인 금지: 돈을 건네거나, 서류에 서명하거나, 계좌를 조작하지 않기 동행: 없음 연락할 사람: 서윤아
서윤아의 이름을 적고도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아직 그녀를 믿을 이유는 없었고, 믿지 않을 이유도 충분했다. 다만 어제 그녀가 보낸 메시지는 한 가지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300만 원은 수익이 아니었다.
재혁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혁은 아침부터 세 번 전화를 걸어왔다. 태준은 모두 받지 않았다. 네 번째 전화가 끊긴 직후 메시지가 도착했다.
— 오늘은 실수하지 마. 네가 멈추면 다른 사람이 들어간다.
태준은 메시지를 캡처해 별도 폴더에 저장했다. 파일 이름은 ‘압박_01’로 정했다. 아버지의 빈 수첩에 적힌 방식대로, 날짜보다 먼저 상황을 적었다.
청람비즈센터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태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주식 시세를 보여 주는 전광판이 고가도로 아래에서 깜빡였다. 빨간 숫자와 파란 숫자가 번갈아 올라갔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 서서 화면을 올려다봤지만, 누구도 그 숫자가 어떤 회사의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믿을 만해 보이는 숫자가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낮의 청람비즈센터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1층 세탁소의 유리문에는 임대 문의가 붙어 있었고, 건물 안내판에는 작은 사무실 이름이 여럿 적혀 있었다. 지하 주차장 입구 옆에는 방문객 출입증 발급기가 있었다.
태준은 안내 데스크에 다가갔다.
“지하에 있는 사무실을 찾고 있습니다. 방문자 등록을 해야 하나요?”
안내 직원은 태준의 얼굴과 휴대전화를 번갈아 보았다.
“몇 층 어느 업체요?”
“정확한 업체명은 모릅니다. 지도에 표시된 장소만 받아서요.”
“그럼 출입증을 발급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데스크 옆에 쌓인 임시 출입증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카드에는 업체명 대신 번호만 인쇄되어 있었다. A-14, B-09, M-17.
태준은 걸음을 멈췄다.
“저 카드들은 어떤 용도입니까?”
“공용 회의실이나 임시 방문객용이에요. 왜요?”
“17번 카드를 본 적이 있어서요.”
직원은 태준을 잠시 바라보다가 카드를 정리했다.
“사용 기록은 관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부인에게는 보여 드릴 수 없어요.”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뒤 메모장에 적었다.
‘M-17 표기와 출입증 번호 형식 일치. 사용 기록은 관리실 보관.’
그 순간 주차장 출구 쪽에서 검은 승합차가 천천히 나왔다. 뒷좌석 창문은 어둡게 가려져 있었고, 운전자는 태준을 보지 못한 듯 지나갔다. 그는 차 번호를 적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번호를 기록하는 것과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서윤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혼자 갔군요.
태준은 주변을 살폈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 출입증을 확인했다면 바로 나오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그들이 당신이 무엇을 찾는지 알게 됩니다.
태준은 답장을 보냈다.
— 당신은 누굽니까?
답은 한참 뒤에 왔다.
— 과거에는 그곳의 확률을 계산했고, 지금은 사람들이 잃은 이름을 계산합니다.
“확률을 계산했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딜러인지, 분석가인지, 아니면 조직 안에서 다른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태준은 다시 청람비즈센터를 바라봤다. 건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했다.
그때 안쪽에서 한 여자가 나왔다. 검은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린 사람이었다. 그녀는 안내 데스크로 가지 않고 곧장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손에는 낡은 파란색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 모서리에는 은색 선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태준은 본능적으로 두 걸음 따라갔다가 멈췄다. 여자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려다 돌아섰다.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강태준 씨?”
태준의 목이 잠겼다.
“누구십니까?”
여자는 서류봉투를 품에 안았다.
“서윤아예요.”
사진으로 본 적도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메시지에서 느껴졌던 것처럼 차분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압니까?”
“재혁이 초대 명단에 올렸습니다.”
“그럼 당신도 그쪽 사람입니까?”
윤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주차장 쪽에서 차가 한 대 더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여기서 얘기할 장소는 아닙니다.”
“아버지의 창고와 300만 원을 알고 있더군요.”
“알고 있는 게 아니라, 확인하고 있는 겁니다.”
“최미라는 누구입니까?”
윤아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태준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 이름을 어디서 봤어요?”
“17번 서랍에서요.”
윤아는 서류봉투를 더 세게 쥐었다.
“그럼 이미 늦었네요.”
“무엇이 늦었다는 겁니까?”
“그 돈이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된 순간부터, 당신은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게 됩니다.”
“저는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당신이 돈을 쓰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당신이 돈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기다립니다.”
윤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여 줬다. 이름이 지워진 계좌 내역과 여러 개의 시간표가 겹쳐 있었다. 금액은 모두 작았지만, 같은 시간대에 반복되어 있었다.
“이 숫자들은 투자 수익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환불되기 전 잠깐 머무는 돈이에요. 누군가 승인 버튼을 누르면, 돈의 책임이 다음 계정으로 넘어갑니다.”
“그럼 제가 받은 300만 원도…”
“피해자 한 명의 환불 대기금일 가능성이 큽니다.”
태준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300만 원을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은 병원비와 월세였다. 그 돈 뒤에 다른 사람의 병원비와 월세가 있었다면, 자신이 손을 대는 순간 누군가의 하루가 더 무너질 수 있었다.
“왜 저에게 말해 줍니까?”
“당신 아버지가 예전에 같은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윤아는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된 장부 사본이었다. 상단에는 2008년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한쪽 구석에 강만석의 서명이 있었다. 태준은 아버지의 글씨를 알아봤다.
“이걸 어디서…”
“당신 아버지는 이 건물 지하 사무실에서 이상 거래를 기록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장부를 숫자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장부에는 돈을 받은 사람과 잃은 사람의 이름이 함께 있었죠.”
“아버지는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가족이 먼저 무너졌어요.”
태준은 아버지가 창고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가려고 했다. 그 말은 조직을 떠나려 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장부를 세상 밖으로 가져가려 했다는 뜻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윤아는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지금 떠나야 합니다.”
“당신은요?”
“저는 다른 출입구로 나갑니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습니까?”
“당신이 300만 원을 그대로 보관하고, 어떤 버튼도 누르지 않는다면요.”
“그다음에는요?”
“최미라를 찾아야 합니다.”
윤아가 돌아서려는 순간, 안내 데스크 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들어온 사람, 아직 밖에 있습니까?”
태준은 몸을 굳혔다.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찾는 말처럼 들렸다. 윤아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두 사람은 주차장 기둥 뒤로 물러났다.
관리실 방향에서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잠시 뒤 태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가 없는 문자였다.
— 출입증을 발급받지 않은 방문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태준은 화면을 끄지 못했다. 윤아가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보여 주세요.”
윤아는 메시지를 읽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들이 당신을 확인했어요.”
“당신 때문입니까?”
“아니요. 당신이 창고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만나자고 했습니까?”
“당신에게 선택권이 남아 있을 때 만나야 했으니까요.”
윤아는 주차장 반대편의 비상계단을 가리켰다.
“저 계단으로 올라가면 건물 뒤편 골목으로 나갑니다. 뛰지 말고, 뒤를 계속 확인하지도 마세요. 누군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자꾸 돌아보면 오히려 눈에 띕니다.”
“그건 꽤 익숙한 말처럼 들리네요.”
“익숙해서 싫은 말입니다.”
태준은 계단으로 향했다. 한 층을 올라가자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벽에 붙은 비상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초록색 불빛은 안전을 알리는 표시였지만, 그날 태준에게는 누군가가 지나간 자리를 세는 숫자처럼 보였다.
건물 뒤편 골목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태준은 우산을 펴고 천천히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손에 작은 플라스틱 카드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M-17.
언제 윤아가 쥐여 줬는지 알 수 없었다. 카드 뒷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출입증은 문을 여는 도구가 아니라, 누가 안에 있었는지 남기는 기록이다.’
태준은 카드를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300만 원이 들어 있는 계좌를 다시 확인했다.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돈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거실 불을 켜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냐?”
“청람비즈센터에 다녀왔어요.”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누가 보냈어?”
“서윤아라는 사람이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준은 M-17 카드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카드를 보자마자 손을 떼었다.
“그걸 어디서 났어?”
“그곳에서요. 아버지가 2008년에 장부를 기록했던 곳.”
아버지는 의자에 앉았다.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그 번호는 출입증 번호가 아니야.”
“그럼 뭡니까?”
“피해자 분류 번호였다.”
태준은 카드 뒷면을 다시 봤다. 은색 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선 두 개가 서로 교차하며 작은 문처럼 보였다.
“최미라는 M-17입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의 침묵에서 답을 읽었다.
“그 사람이 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라면, 왜 제 계좌로 보냈어요?”
“사람을 대신 세우는 방식이 바뀐 거다.”
“누가요?”
“그 이름을 말하면, 네가 다시 그 건물로 가게 된다.”
“이미 갔어요.”
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면 이제 네가 결정해야 한다. 돈을 돌려보낼 방법을 찾을 것인지, 모른 척하고 네 빚부터 갚을 것인지.”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테이블 위 독촉장은 아직 버려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300만 원은 여전히 필요한 돈이었다. 그러나 그 돈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면, 필요한 돈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져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재혁의 전화였다. 태준은 받지 않았다.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 출입증을 받았네. 이제 우리 쪽으로 오면 된다.
태준은 문장을 읽고, M-17 카드를 바라봤다. 문을 여는 도구라던 윤아의 말과, 피해자 분류 번호라던 아버지의 말이 겹쳤다.
그는 계좌 화면을 열었다. 송금 버튼 앞까지 갔다가 손을 멈췄다. 돈을 돌려보내는 것조차 수취인을 확인하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를 만들 수 있었다.
태준은 송금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캡처하고, 계좌 내역과 메시지를 모두 보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금융범죄 신고 절차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의 첫 문장은 짧았다.
‘의심되는 거래는 임의로 이동하지 말고 기록과 함께 상담하십시오.’
태준은 그 문장을 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기록부터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네가 나처럼 늦지 않는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태준의 휴대전화에 마지막 알림이 도착했다.
— M-17의 다음 출입자는 최미라입니다.
그 아래에는 청람비즈센터 지하 출입구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속 문은 닫혀 있었고, 문 옆의 카드 리더기에는 작은 붉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태준은 사진을 저장했다. 파일 이름은 ‘최미라_다음’으로 정했다.
그리고 계좌 잔액 아래에 처음으로 다른 숫자를 적었다.
‘피해자 1명. 확인 전 이동 금지.’
회색지대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누가 그 문 앞에 서 있었는지는 이제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