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승률
어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태준이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을 때였다.
발신자 표시에는 숫자도 이름도 없었다. 어머니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전화를 받았고, 태준은 현관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태준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지만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숨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경보음이 들렸다.
“누구세요?”
어머니가 다시 묻자 전화가 끊겼다.
태준은 현관에서 돌아섰다. 어머니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도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태준은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말한 17번 서랍은 창고 안에 있었다. 지금 가면 아버지에게 따져 물을 수 있었다. 300만 원의 출처와 검은 화면, 서윤아라는 이름과 어머니에게 걸려 온 전화까지 한꺼번에. 하지만 아버지는 혼자 오라고 했다. 그 말은 창고에 혼자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를 믿고 데려오지 말라는 뜻처럼 들렸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 9:30. 화면을 열어.
재혁의 메시지였다. 태준은 답장 대신 메시지를 캡처했다. 이번에는 대화방을 나가지 않았다. 화면 아래쪽에 회색으로 비어 있는 칸이 길게 남아 있었다. 2화에서 보았던 빈 메시지 칸이었다. 누군가 글을 지운 자리인지,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
태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여덟 시 오십삼 분. 창고까지 택시로 삼십 분, 9시 30분까지 남은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어디 가니?”
어머니가 뒤에서 물었다.
“아버지 만나러요.”
“지금?”
“금방 다녀올게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준이 현관을 나서기 직전에 말했다.
“태준아. 돈 같은 건…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건 받지 마.”
태준은 돌아봤다. 어머니는 식탁 위의 병원 봉투를 만지고 있었다. 그녀가 300만 원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아들의 얼굴에 드러난 불안을 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받은 게 아니에요.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그게 더 무서운 거야.”
어머니의 말은 작았지만 오래 남았다.
창고 단지에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쳤다. 새벽의 물기가 아스팔트에 남아 있었고, 트럭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스며들었다. 17번 창고의 셔터는 올라가 있었다. 안쪽에서 아버지가 상자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강만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는 작업대 위에 세 개의 물건을 나란히 놓고 있었다. 오래된 철제 열쇠, 접힌 영수증, 그리고 은색 선이 새겨진 검은 카드 조각이었다.
“17번 서랍 열어 봐라.”
“그 전에 설명부터 해 주세요.”
“열고 나면 설명할 수 있다.”
“늘 그 말만 하잖아요.”
태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는 한 번도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시선을 작업대 아래로 내렸다.
태준은 열쇠를 집어 들고 벽 쪽 낡은 서랍장으로 갔다. 서랍에는 1번부터 20번까지 작은 숫자표가 붙어 있었다. 17번은 다른 서랍보다 칠이 벗겨져 있었고, 손잡이 아래에 얇은 자국이 여러 겹 남아 있었다.
열쇠가 두 번 걸렸다. 세 번째에야 자물쇠가 돌아갔다.
서랍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태준은 비어 있는 내부를 한참 바라봤다. 먼지 위에는 가느다란 직사각형 자국 하나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봉투나 장부를 꺼낸 뒤 다시 닫은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뒤에서 숨을 들이켰다.
“누가 가져갔어요?”
“모른다.”
“아버지 서랍이잖아요.”
“어제까지는 있었어.”
“그럼 누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태준은 서랍 안쪽 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먼지 사이로 파란 잉크 자국이 번져 있었다. 짧은 숫자와 글자가 겹쳐 있었지만, 마지막 두 글자만은 읽을 수 있었다.
‘미라.’
태준은 손을 멈췄다.
“최미라?”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어?”
“아직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시네요.”
강만석은 서랍을 닫으려 했다. 태준이 손으로 막았다.
“최미라가 누구예요?”
“돈을 잃은 사람이다.”
“어디서요?”
“사람들은 돈을 잃으면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돈은 처음부터 잃도록 배치된다.”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태준에게는 경고가 아니라 자백처럼 들렸다.
그때 태준의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새벽의 장부] — 첫 번째 승률 공개까지 30분.
곧이어 대화방에 숫자들이 올라왔다. 종목명이나 계좌번호는 없었다. 300, 72, 9:30, 그리고 빈 메시지 칸. 태준은 숫자들의 배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화면을 확대했다. 300은 입금액, 9시 30분은 예정된 시각이었다. 72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걸 보면 뭘 하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버지가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태준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재혁이었다.
“받지 마.”
아버지가 낮게 말했다.
태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재혁이 물었다.
“네가 알아야 할 곳은 아니야.”
“아버지 창고?”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재혁은 한숨을 쉬었다.
“태준아, 네가 지금 뭘 의심하는지는 알겠는데, 오늘 한 번만 보면 돼. 돈을 더 넣으라는 것도 아니고, 네 계정으로 열린 화면에서 선택 하나만 하면 돼.”
“선택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네 판단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어.”
“누가 확인해?”
“숫자가.”
태준은 웃음이 나왔다. 1화에서 재혁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숫자가 사람 대신 책임져 주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 그는 창고 작업대 위의 영수증을 보았다. 같은 금액이 여러 줄로 쪼개져 있었고, 입금자 이름은 세 자리 코드로 가려져 있었다.
“최미라라는 사람 알아?”
통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누가 그래?”
“17번 서랍에 이름이 남아 있었어.”
“태준아, 그건 네가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 말은 아는 사람만 하던데.”
재혁은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오늘 화면을 열지 않으면, 300만 원은 네 돈으로 처리될 거야.”
“무슨 뜻이야?”
“들어온 돈은 흔적을 남겨. 네가 확인하고 움직이면 돌려보낼 방법이 생겨. 가만히 있으면 네가 받은 걸로 끝난다고.”
“어떻게 움직이라는 건데?”
“9시 30분에 화면이 열리면, 네 계정에 ‘승인’ 버튼이 나타날 거야. 그걸 누르면 돈의 출처가 임시로 바뀐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누르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그 돈을 찾는 사람들이 네가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걸 알게 돼.”
통화가 끊겼다.
태준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작업대 위의 검은 카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재혁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마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기록해.”
“기록한다고 뭐가 바뀌어요?”
“나중에 네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는 낡은 수첩 한 장을 찢어 태준에게 건넸다. 태준은 시간을 적었다. 9시 17분. 재혁의 전화. 승인 버튼. 최미라. 300만 원.
손끝이 떨렸다. 숫자를 적는 동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미 어떤 판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9시 29분이 되자 대화방의 빈 칸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 관찰자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검은 화면이 노트북에서 저절로 열렸다. 화면 중앙에는 세 개의 문장이 떠 있었다.
[입금 확인] [출처 보류] [첫 번째 승률 참여]
태준은 ‘출처 보류’ 항목을 눌렀다. 상세 화면에는 숫자 대신 작은 문장이 나왔다.
— 피해자의 돈을 다음 사람의 판단으로 바꾸는 중.
그는 즉시 창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마우스 커서가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하단에 승인 버튼이 천천히 밝아졌다. 버튼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300만 원의 수취 책임이 확정됩니다.’
태준은 그 문장을 읽고 손을 떼었다. 돈을 받았다는 사실과 돈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달랐다. 하지만 화면은 둘을 같은 칸에 넣으려 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누르지 마.”
태준은 버튼을 바라봤다. 어머니의 검사비, 밀린 월세, 카드사 전화가 차례로 떠올랐다. 300만 원은 당장 그의 삶에서 가장 현실적인 숫자였다. 그 숫자를 거절하면 가족은 다음 달을 버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손실을 자신의 구명줄로 삼을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서윤아였다.
— 강태준 씨, 승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 기록의 일부가 됩니다.
태준은 화면을 캡처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커서를 움직여 승인 버튼이 아닌 ‘세부 기록’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며 짧은 목록이 나타났다.
입금 원천: 미상. 중간 계정: 3개. 최초 표기: M-17. 기록 상태: 일부 삭제.
M-17. 태준은 17번 서랍을 떠올렸다. 창고 안 공기가 갑자기 좁아졌다. 아버지는 화면을 보자 눈을 감았다.
“이제 알겠어요?”
“아직 모른다.”
“아버지는 알고 있잖아요.”
“나는 시작만 알고 있다.”
태준은 기록 목록을 휴대전화로 옮기려 했다. 그때 화면의 빈 메시지 칸이 다시 흔들렸다. 삭제된 줄이 하나씩 복원되는 듯했지만 글자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맨 아래에 계정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최미라.
태준은 손을 멈췄다. 계정 옆에는 ‘환불 대기’라는 표기가 있었다. 300만 원은 수익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었고, 그 돈은 지금 그의 계좌를 통과하며 책임의 이름을 바꾸고 있었다.
9시 35분, 화면이 닫혔다. 승인 버튼은 사라졌지만, 마지막 문장이 남았다.
— 첫 번째 승률 기록 완료. — 선택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도 기록됩니다.
태준은 노트북을 덮었다. 300만 원은 여전히 계좌에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무언가를 선택한 뒤였다.
창고 밖에서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강만석은 불을 끄고 셔터 쪽으로 다가갔다. 태준은 창고 틈 사이로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단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번호판은 보이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재혁의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 네가 승인하지 않은 기록을 누가 대신 승인했는지, 곧 알게 될 거야.
그가 펜을 내려놓자,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이제 집에 갈 거냐?”
태준은 17번 서랍을 바라봤다. 비어 있는 먼지 자국과 ‘미라’라는 이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요.”
“어디로?”
“최미라를 찾으러요.”
강만석의 얼굴에 처음으로 분명한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 사람을 찾으면, 네가 돌아갈 곳이 없어질 수도 있다.”
태준은 창고 밖의 밝아진 하늘을 바라봤다. 회색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려왔지만, 어느 쪽이 낮이고 어느 쪽이 밤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미 돌아갈 곳은 없어진 것 같아요.”
그때 17번 서랍 안쪽에서 아주 작은 알림음이 났다. 빈 서랍 바닥 아래, 먼지에 가려진 얇은 휴대전화가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한 문장만 떠 있었다.
— 다음 선택은 카지노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