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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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6

빚의 이자

2026. 10. 16. · 8,201자 · 공백 포함

6화. 빚의 이자

다음 날 아침, 강태준은 오래된 상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이름은 ‘새봄상가’였지만, 봄과는 거리가 먼 회색 외벽을 하고 있었다. 1층에는 문을 닫은 세탁소와 부동산 사무실이 있었고, 2층 복도에는 임대 안내문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서윤아가 보낸 주소는 3층 307호였다. 문 앞에는 간판이 없고, 우편함에는 오래된 전단지만 꽂혀 있었다.

태준은 휴대전화의 메모를 다시 확인했다.

최미라. 마지막 기록. M-17. 열어 보되, 가져오지 말 것.

‘가져오지 말 것’이라는 문장이 이상했다. 기록을 찾으라고 해 놓고, 손에 넣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기록을 미끼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준은 문고리를 바로 잡지 않고, 먼저 계단과 복도의 비상구 위치를 살폈다. 전날 윤아가 혼자 들어가지 말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3층 계단 아래에 있는 작은 카페로 내려갔다. 창가에 앉아 건물 출입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였다. 커피를 주문하지 않고 물 한 병만 샀다. 오전 열 시가 지나자 307호 앞에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낡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여자는 문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봉투에서 열쇠를 꺼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 보고 있죠?

서윤아의 메시지였다.

태준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 여자는 307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십 분 뒤, 다시 나왔다. 손에는 봉투가 없었다. 그녀는 복도 끝 계단으로 내려갔다.

태준은 그제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07호 문은 닫혀 있었고, 문틈에는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기록은 방 안에 없다. 빚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간다.]

그 아래에 주소 하나가 더 적혀 있었다. 건물 뒤편의 작은 공원, 오전 열한 시.

태준은 종이를 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카페로 돌아오자 윤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셨죠?”

“여자가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문에는 다음 장소가 적혀 있어요.”

“그럼 아직 최미라 씨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마세요.”

“왜요?”

“지금은 이름보다 돈의 경로를 먼저 봐야 합니다.”

“항상 절반만 말씀하시네요.”

“전체를 한 번에 알면 사람은 가장 쉬운 부분만 믿으니까요.”

태준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빚 이야기입니까?”

“당신은 지금 300만 원을 빚처럼 들고 있어요.”

“그건 제 돈이 아니에요.”

“당신이 쓰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그 돈을 당신의 선택에 붙여 놓으려 합니다. 이자는 돈에만 붙는 게 아니에요. 시간, 불안, 죄책감에도 붙습니다.”

태준은 어제 본 정산 승인 버튼을 떠올렸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이미 자신은 그 돈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미라 씨가 왜 기록을 찾는지 알아요?”

“알아요. 하지만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도 확실합니까?”

윤아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공원에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세요. 먼저 이름을 묻지 말고, 무엇을 기록했는지 물으세요.”

전화가 끊긴 뒤 태준은 은행 앱을 열었다. 300만 원은 그대로였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지만, 계좌 아래에는 ‘거래 확인 필요’라는 안내가 떠 있었다. 그는 이 화면을 캡처하지 않고 상담 창을 열었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입금에 대해 확인 가능한 공식 절차를 문의하자, 상담원은 거래 내역과 본인 확인 자료를 준비해 지점을 방문하라고 안내했다. 태준은 필요한 서류 목록을 메모했다.

거래 일시. 거래 금액. 출금 계좌 표기. 본인 확인 자료. 임의 송금 금지.

마지막 줄에 밑줄을 그었다. 돈을 돌려보내는 것도 자신의 판단으로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상대가 급하게 재촉할수록, 절차는 더 천천히 확인해야 했다.

열한 시가 되기 전, 태준은 공원으로 향했다. 새봄상가 뒤편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작은 정자가 있었다. 늦가을 나뭇잎이 바닥에 쌓여 있었고, 정자 아래에는 회색 코트를 입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아침에 307호에 들어갔던 사람이었다.

여자는 태준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강태준 씨죠?”

“네.”

“저는 최미라예요.”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은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목소리와 얼굴을 함께 만나는 순간 그 숫자들이 사람의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미라는 서류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이름부터 확인하셨네요.”

“당신이 남긴 기록을 보러 왔습니다.”

“기록은 제가 남긴 게 아니라,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 둔 거예요.”

미라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계좌에 300만 원이 들어왔죠?”

“네.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돈은 제 돈이었어요.”

“환불 대기금이라고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환불금은 아니었어요.”

미라는 공원 바닥을 바라봤다.

“작년 겨울에 어머니 수술비가 급하게 필요했어요. 투자방에서 하루만 맡기면 원금에 조금 얹어 돌려준다는 말을 들었죠. 빚을 내서 넣은 건 아니었어요. 이미 있던 적금을 깬 돈이었어요.”

태준은 메모장을 꺼냈다.

“기록해도 될까요?”

“이름과 계좌번호는 적지 마세요. 날짜와 금액만.”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넣은 돈은 얼마였습니까?”

“삼백만 원.”

“그 돈이 왜 제 계좌로 들어온 겁니까?”

미라는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거래 번호와 날짜, 금액만 적혀 있었다. 출금 계좌와 입금 계좌의 이름은 모두 가려져 있었다.

“제가 환불을 요구하자, 담당자는 이미 처리됐다고 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 다른 사람이 연락해서 ‘새 계정으로 옮겨야 원금이 살아난다’고 했죠.”

“그 말을 믿었습니까?”

“믿고 싶었어요.”

미라의 대답은 짧았다.

“믿고 싶은 사람은 설명이 부족해도 빈칸을 자기 마음으로 채워요. 저는 원금이 돌아오면 어머니 병원비를 갚고, 동생에게 빌린 돈도 돌려주려고 했어요.”

“그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환불 날짜가 계속 바뀌었어요. 오늘, 다음 주, 다음 정산. 그때마다 작은 수수료를 내야 한다고 했고요. 저는 추가로 돈을 보내지 않았어요. 대신 제가 보낸 돈이 어디로 갔는지 기록하기 시작했죠.”

미라는 봉투 안쪽에서 복사한 메모를 꺼냈다.

[최미라의 기록] 입금 300만 원. 환불 예정일 3회 변경. 추가 수수료 요구 2회. 담당자 이름 변경 4회. 최종 안내: M-17. 현재 계좌: 확인 불가.

태준은 마지막 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M-17은 계좌 번호가 아니었군요.”

“사람을 분류하는 번호였어요. 환불을 기다리는 사람, 책임을 넘길 계정, 연락이 끊긴 사람. 정확한 기준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 번호가 붙으면 사람들은 이름 대신 순서가 됐어요.”

“그럼 제가 받은 300만 원은?”

“당신이 다음 순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태준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의 계좌에 돈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실이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형태로 옮겨 온 것이었다.

“왜 저를 찾은 겁니까?”

“당신 이름을 본 건 어제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거래 기록에 강만석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태준의 손이 멈췄다.

“우리 아버지요?”

미라는 대답 대신 다른 종이를 꺼냈다. 오래된 명단이었다. 강만석의 이름 옆에는 ‘회계 확인’이라는 메모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날짜와 세 자리 코드가 반복되어 있었다.

“이 명단은 어디서 났습니까?”

“청람비즈센터 사무실에서 복사했습니다. 원본은 가져오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이 일에 참여했다는 뜻입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버지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이 붙은 장부에서 제 돈의 흐름이 시작됐습니다.”

태준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돈을 보내는 이유는 두 가지다. 갚으라고 보내거나, 움직이라고 보내거나.’ 강만석은 이미 이 구조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연락한 적 있습니까?”

“한 번. 제가 기록을 찾기 시작한 뒤였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더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라는 종이를 접었다.

“그래서 더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돈을 잃은 사람에게 위험을 말하는 건 너무 늦은 경고일 때가 많아요. 이미 우리는 한 번 잃었으니까요.”

태준은 미라가 단순히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 돈보다 기록을 찾으려는 이유가 이제 조금 이해됐다.

그때 공원 입구에 회색 승합차 한 대가 멈췄다. 미라는 말을 멈추고 봉투를 닫았다.

“저 차를 아세요?”

태준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미라의 표정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서류 봉투를 태준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윤아는 기록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본이 아니라 사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태준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진을 찍고 다시 돌려주세요. 그리고 오늘 본 내용을 혼자 갖고 있지 마세요.”

태준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미라는 종이를 한 장씩 펼쳤다. 태준은 계좌번호와 개인 정보가 보이는 부분을 가린 뒤, 날짜·거래 번호·금액·담당자 변경 기록만 촬영했다. 사진을 찍은 뒤 원본은 즉시 미라에게 돌려주었다.

승합차가 공원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어디서 만납니까?”

“당분간 만나지 마세요.”

“하지만 아버지 이름이—”

“아버지에게 직접 확인해야 해요. 그 전에 누군가에게 이 기록을 넘기면, 기록 자체가 사라질 수 있어요.”

미라는 태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은 아직도 아버지를 보호하고 있네요.”

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부딪혔다. 아버지가 피해자였는지, 침묵으로 구조를 도왔는지, 둘 다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저는 제가 본 것만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 말은 좋은 시작이에요. 다만 시작이 끝이 되지 않게 하세요.”

미라는 정자 뒤편의 산책로로 사라졌다. 태준은 승합차가 공원 입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번호판은 진흙으로 가려져 있었고, 차 안에 누가 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윤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만났습니까?

태준은 사진 파일의 이름을 날짜와 시간으로 바꿔 저장한 뒤 답장을 보냈다.

— 최미라 씨를 만났습니다. 300만 원은 환불 대기금이었고, M-17은 피해자 분류 번호였습니다. 거래 기록에 아버지 이름이 있습니다.

윤아의 답은 늦게 왔다.

— 이제 빚의 이자가 시작됐네요.

태준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이름이 들어간 순간, 당신은 돈만 돌려받으면 끝나는 사람이 아니게 됐어요. 이제 가족의 과거와 현재의 피해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관련됐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확인하는 동안 누군가는 당신의 불안을 이용하려 할 거예요.”

“재혁처럼요?”

“재혁보다 더 오래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

전화가 끊긴 뒤 태준은 메모장에 새로운 항목을 적었다.

[확인 필요] - 2008년 장부의 회계 확인 메모. - M-17의 분류 기준. - 강만석 이름이 들어간 거래 기록. - 최미라 환불 대기금의 이동 경로. - 300만 원을 현재 계좌로 보낸 주체.

그는 마지막 항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확인 전에는 누구도 가해자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확인 전에는 누구도 무죄라고 믿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방 안에 있었고, 냉장고에서는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강만석은 태준이 들어오자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최미라를 만났구나.”

태준은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 사람은 오래 혼자 움직이지 못해.”

“아버지 이름이 기록에 있습니다.”

강만석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슨 기록?”

“2008년 장부. 회계 확인 메모. M-17.”

아버지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태준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도 기록해야 할 정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돈을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했어요?”

“장부를 맞췄다.”

“누가 보낸 돈인지 확인했습니까?”

“처음에는.”

“나중에는요?”

강만석의 손가락이 식탁 위를 천천히 두드렸다.

“나중에는 숫자만 맞추라는 지시를 받았다.”

태준은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은 죄를 인정하는 고백도, 완전한 부인도 아니었다. 다만 장부를 통해 사람이 지워졌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때 그만두지 않았잖아요.”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못 그만뒀고.”

“네가 아팠고, 집에 빚이 있었고, 그들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태준은 어제 자신이 쓴 문장을 떠올렸다. 빚은 돈에만 붙는 게 아니었다. 시간, 불안, 죄책감에도 붙었다. 아버지는 그 이자를 십 년 가까이 혼자 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말하면 네가 나를 용서하거나, 나를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것 같았어.”

“저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무섭다.”

아버지는 서랍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오래된 장부의 일부를 복사한 종이가 있었다. 태준은 종이를 펼쳤다. 여러 사람의 이름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고, 맨 아래에는 ‘이자 반영 후 다음 계정’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이게 뭡니까?”

“돈이 부족해질 때마다 새 사람의 계좌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회계상 임시 처리라고 했다. 그런데 임시가 계속되면, 그게 구조가 된다.”

“제 계좌도 그 구조에 들어간 겁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번에는 긍정처럼 들렸다.

태준은 종이를 접었다.

“이 원본은 어디 있어요?”

“모른다.”

“정말 모릅니까, 말하지 않는 겁니까?”

강만석은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내가 숨겼고, 일부는 그들이 가져갔다.”

“왜 지금 이걸 보여 줘요?”

“네가 이미 안쪽까지 들어갔으니까.”

“그럼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태준을 바라봤다.

“나가야 한다.”

“왜요?”

“빚은 사람을 붙잡는 데 돈보다 오래 걸리는 도구다. 네가 가족을 지키겠다고 들어가면, 그들은 네 가족을 더 깊게 이용할 거야.”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원비, 자신의 계좌, 미라의 환불금, 아버지의 장부. 모두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줄을 끊는 방법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태준은 집 근처 구청의 금융복지 상담실에 문의 예약을 남겼다. 개인 채무와 가족 명의의 오래된 채무를 구분해 확인하고, 출처 불명 자금을 임의로 움직이지 않는 절차를 안내받기 위해서였다. 상담 신청서에는 조직 이름을 적지 않고, 자신이 확인한 사실과 모르는 부분을 나누어 적었다. 해결을 약속하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함께 보는 곳이 필요했다.

상담 신청을 끝내자 새벽의 장부 대화방에 알림이 떴다.

[이자 계산 완료] 원금: 3,000,000원. 경과 시간: 1일. 다음 책임 계정: 강태준. 가족 연계 가능성: 68%.

태준은 숫자를 보며 손가락을 굳혔다. 이것은 금융 계산이 아니라 협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누군가가 숫자로 적어 놓으면, 사람은 그 숫자에 의미가 있는지부터 확인하려 한다.

그는 화면을 캡처하고, 대화방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메모장에 기록했다.

‘이자는 돈의 시간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문장이다.’

곧이어 익명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아버지가 숨긴 장부를 찾으면, 이자는 멈춥니다.

태준은 아버지가 앉아 있던 식탁을 바라봤다. 빈 의자 위에는 오래된 종이봉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허락 없이 가족의 서류를 뒤질 권리는 없었다.

대신 아버지에게 물었다.

“내일 같이 확인해 줄 수 있어요?”

방 안에서 한참 뒤 대답이 들렸다.

“무엇을?”

“어디까지가 아버지의 잘못이고, 어디부터가 그들의 책임인지.”

침묵 뒤에 강만석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걸 구분할 수 있겠니?”

태준은 식탁 위의 메모장을 덮었다.

“구분할 수 없으니까 기록하는 거예요.”

새벽 세 시, 계좌의 300만 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돈에 붙은 이름은 늘어나고 있었다. 최미라, M-17, 강만석, 그리고 강태준.

태준은 화면을 끄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줄을 적었다.

빚은 갚아야 하지만, 남의 빚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책임은 아니다.

검은 화면 아래에서 알림이 한 번 더 떴다.

— 다음 이자는 가족의 집으로 청구됩니다.

· · ·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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