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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

확률의 언어

2026. 10. 15. · 6,744자 · 공백 포함

5화. 확률의 언어

아침 일곱 시, 강태준의 휴대전화에는 밤새 쌓인 알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새벽의 장부 대화방, 민재혁의 부재중 전화 세 통, 그리고 저장해 둔 최미라의 이름. 태준은 화면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숫자는 어젯밤과 같았지만, 숫자 사이에 끼어 있던 사람들의 위치는 달라져 있었다.

그는 식탁 위에 메모지를 펼쳤다.

최미라. M-17. 300만 원. 청람비즈센터. 임시 출입증. 신고 절차 확인.

마지막 줄 아래에는 전날 서윤아가 했던 말이 적혀 있었다.

돈을 움직이면 책임이 다음 계정으로 넘어간다.

태준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처음에는 경고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에는 누군가의 경험담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읽었을 때는 그 말이 이 조직이 사람을 다루는 방식의 설명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옮겨 가는 순간, 돈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길 사람이 바뀐다.

그때 노트북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새벽의 장부 대화방에 새 글이 올라왔다.

[오늘의 확률표] 09:10 — 상승 가능성 62% 09:30 — 확인 구간 14:00 — 회수 가능성 78% 장 마감 전 — 참여자별 정산

태준은 표를 확대했다. 종목 이름은 없었다. 가격도, 거래량도, 출처도 없었다. 그런데도 참여자들은 곧바로 반응했다.

— 오늘은 안전하네요. — 어제보다 확률이 높습니다. — 62%면 들어가도 되겠죠?

태준은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석이 아니라 허락이었다. 숫자가 선택의 책임을 대신해 주길 바라는 사람들.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목을 조였다.

민재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준은 이번에는 받았다.

“아침부터 조용하네. 표 봤지?”

“봤어.”

“오늘은 네가 판단하면 돼. 어제 네 계좌에 들어간 돈도 그대로 있고.”

“그 돈에 손대지 않기로 했어.”

재혁이 짧게 웃었다.

“겁먹었냐?”

“출처가 없는 돈을 쓰는 건 겁과 상관없는 문제야.”

“출처가 없긴 왜 없어. 네가 확인해야 할 자료가 아직 안 열린 거지.”

“그럼 자료를 보여 줘.”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재혁은 평소처럼 가볍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조금 내려앉았다.

“자료는 단계가 있어. 처음부터 전부 보여 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

“사람 돈이 움직이는데 단계가 있다는 말로 감추면 안 되지.”

“태준아, 너는 원래 숫자만 보면 사람을 잊어버리잖아. 이번에는 사람을 생각해. 네 어머니 병원비도 사람이고, 네 아버지 빚도 사람이다. 돈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다친다고.”

그 말은 정확히 태준이 듣고 싶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재혁은 언제나 그의 약한 곳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점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대신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었다.

“최미라 씨를 알아?”

재혁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누구?”

“M-17로 기록된 사람. 청람비즈센터 출입증에 있던 이름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게 먼저 대답할 질문이야?”

재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태준에게는 대답보다 선명했다.

“그 이름은 어디서 들었어?”

“네가 아는 이름인지부터 말해.”

“태준아, 그 사람은 이미 정리된 건이야.”

“정리됐다는 게 무슨 뜻인데?”

“환불 절차가 끝났거나, 끝나지 않았거나.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그럼 왜 그 사람 돈이 내 계좌에 들어왔어?”

전화가 끊겼다.

태준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재혁이 통화를 먼저 끊은 것은 대학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그가 말한 ‘정리’라는 단어가 귓가에 남았다. 사람의 피해를 서류 한 줄로 접어 두는 말. 금액이 맞으면 끝난 것으로 처리하고, 금액이 맞지 않으면 담당자가 바뀌는 말.

노트북 화면에 새 메시지가 떴다.

— 확률은 사실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보낸 사람은 서윤아였다.

태준은 답장을 썼다.

— 그 문장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잠시 뒤 답이 왔다.

— 사람들에게 숫자를 믿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요.

— 최미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 아직 살아 있고, 기록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이 방에서 말하는 확률은 발생 가능성이 아닙니다.

— 그럼 뭡니까?

— 참여자를 움직일 가능성입니다.

태준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62%가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아니라, 62%의 사람들이 움직일 거라는 뜻이라면 표의 숫자들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사람을 움직이는 정도를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 믿음을 수치로 바꾼 것.

윤아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 오전, 재혁이 당신을 만나자고 할 겁니다. 만나더라도 돈과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리지 마세요. 설명을 듣고 기록만 하세요.

— 왜 당신이 이런 걸 알려 줍니까?

— 나도 한때 그 언어를 만들었으니까요.

태준은 그 문장을 읽고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아는 두 번 울린 뒤 받았다.

“그 언어가 뭐였습니까?”

“확률, 예측, 회수율, 성공률. 사람들이 불안할수록 잘 먹히는 단어들이죠.”

“숫자가 틀린 겁니까?”

“숫자가 틀렸다고 말하면 쉬워요. 더 정확히 말하면, 숫자와 질문이 서로 달랐습니다.”

“무슨 뜻이죠?”

“사람들은 돈을 잃을 확률을 물었는데, 우리는 참여자가 버튼을 누를 확률을 계산했어요. 사람들은 실제 손실을 물었는데, 우리는 화면에 표시된 수익률만 말했죠.”

태준은 창밖을 보았다. 골목 끝 세탁소의 셔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평범한 아침의 소리였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전날의 청람비즈센터 복도와 임시 출입증이 겹쳐졌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했습니까?”

“처음에는 몰랐어요. 나중에는 모른 척했고요.”

“왜 그만두지 못했습니까?”

“그만두면 내 이름이 다음 명단에 올라갈 거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윤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은 오랫동안 무서움을 다룬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태준 씨,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건 영웅이 되는 게 아니에요. 돈을 옮기지 말고, 누가 어떤 표현으로 당신을 움직이려 하는지 기록하세요. 그 기록이 있어야 나중에 피해자들이 같은 말을 들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최미라 씨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아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을 돌려받으려는 대신 기록을 찾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찾고 있는데요?”

“오늘은 말할 수 없습니다.”

태준은 화가 났다.

“어제도, 오늘도 모두 절반만 말하네요.”

“절반만 말해야 안전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나는 뭡니까?”

“아직 선택하지 않은 사람.”

그 말이 전화보다 먼저 끊겼다.

오전 열 시, 재혁은 동네의 작은 카페로 태준을 불렀다. 창가 쪽 자리에 앉은 재혁은 예전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깔끔한 셔츠, 손목시계,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왼쪽 입꼬리. 하지만 태준은 이제 그 표정 뒤에서 계산되는 것을 먼저 보게 됐다.

재혁은 태블릿 화면을 돌려 보였다. 그래프와 원형 차트, 녹색 숫자가 정돈되어 있었다.

“이건 오늘 자금 흐름이야. 네가 아는 시장 자료와 달라. 내부 참여자들만 볼 수 있는 정보지.”

“출처는?”

“내부 데이터.”

“누가 만든 데이터인데?”

“그게 중요해?”

“가장 중요하지.”

재혁은 한숨을 쉬었다.

“너는 항상 첫 질문부터 분위기를 망쳐.”

“분위기로 돈을 설명할 수는 없어.”

재혁은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예상 성공률 78%’라는 문장이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참여자의 선택과 외부 환경에 따라 변동될 수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태준은 웃음이 나왔다.

“78%라고 크게 쓰고, 책임은 작은 글씨로 숨겼네.”

“그건 업계 표준이야.”

“가상의 표준을 누가 만들었는데?”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은 태블릿을 만지지 않고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10시 18분. 재혁, 예상 성공률 78% 제시. 출처: 내부 데이터라고만 설명. 하단 문구: 외부 환경에 따라 변동.

재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너 지금 나를 조사하는 거야?”

“아니. 내가 들은 말을 잊지 않으려고 적는 거야.”

“그 기록이 너를 지켜 줄 것 같아?”

“적어도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는 알 수 있겠지.”

재혁은 잠시 태준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최미라는 네가 생각하는 피해자와 달라. 돈을 넣고, 약속을 믿고, 결과를 기다린 사람. 그게 전부야. 왜 네가 그 사람의 일을 떠안아야 해?”

“그 돈이 내 계좌에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돌려놓으면 되잖아. 화면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돼.”

재혁이 태블릿을 태준 쪽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정산 승인’이라는 버튼이 떠 있었다. 버튼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승인 시 환불 대상과 연결된 자금의 처리 책임이 사용자에게 이전될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태준의 손끝이 멈췄다. 어제 윤아가 했던 말과 같은 뜻이었다. 돈을 움직이는 순간 책임이 다음 계정으로 넘어간다. 이 버튼은 환불이 아니라 책임의 이동을 승인하는 장치였다.

“이 버튼을 누르면 최미라 씨가 돈을 받습니까?”

“절차상 그렇게 돼.”

“절차상이라는 말 말고.”

“네가 왜 이렇게 까다로워졌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제까지는 몰랐어.”

태준은 화면을 사진으로 남기려다가 멈췄다. 카페 안에는 다른 손님들이 있었고, 재혁의 태블릿에 개인 정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단 촬영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사진 대신 화면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재혁은 그 모습을 보며 낮게 말했다.

“태준아, 돈을 돌려주면 네 어머니 병원비를 어떻게 할 건데?”

태준은 메모를 닫았다.

“그 돈이 병원비가 아니니까.”

“네가 그렇게 깨끗한 척할 처지는 아니잖아.”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태준은 자신이 완전히 깨끗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고객의 불안을 숫자로 설명했고, 성과를 위해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남의 손실을 자기 출구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깨끗한 척하는 게 아니야. 더러워진 부분을 구분하는 거야.”

재혁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럼 너는 이제 뭘 할 건데?”

“확인할 거야. 최미라 씨의 기록, 돈이 들어온 경로, 이 버튼을 만든 사람.”

“그걸 확인하면 네가 안전해질 것 같아?”

“안전해지진 않겠지. 그래도 적어도 내 이름으로 승인한 건 없게 할 거야.”

카페 밖에서 차량 경적이 짧게 울렸다. 재혁은 태블릿을 거두었다.

“오늘 밤까지 생각해. 확률은 기다려 주지 않아.”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률은 기다리지 않지만, 사람은 기다릴 수 있어. 나는 오늘은 돈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카페를 나온 뒤 태준은 은행에 전화를 걸어 입금 내역과 확인 가능한 절차를 문의했다. 그는 조직이나 이름을 단정하지 않고, 출처가 불명확한 자금이 들어왔을 때 어떤 공식 확인을 받을 수 있는지만 물었다. 상담원은 필요한 서류와 접수 방법을 안내했지만, 전화를 끊은 뒤에도 태준의 손은 떨렸다. 절차는 느렸고, 돈은 빠르게 움직이려 했다.

그는 메모장 맨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확률의 언어는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숫자를 쓰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작게 보이게 만든다.

오후 두 시가 가까워졌을 때 윤아에게서 위치 하나가 도착했다. 청람비즈센터와는 다른, 오래된 상가 건물의 주소였다.

— 최미라 씨가 마지막으로 기록을 남긴 곳입니다. 혼자 들어가지 말고, 이상하면 바로 나오세요.

태준은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아버지에게 연락했고, 강만석은 한참 뒤에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최미라라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알고 있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돈보다 명단을 찾고 있을 거다.”

“왜요?”

“돈은 한 번 돌려받으면 끝나지만, 이름은 계속 남으니까.”

태준은 눈을 감았다. 오늘 들은 말들이 한 문장으로 이어졌다. 확률은 방향이고, 정산은 책임의 이동이며, 기록은 이름을 지우지 않는 방법이었다.

“아버지, 나 지금 뭘 해야 해요?”

“혼자 영웅이 되지 마라.”

“그럼요?”

“증거를 지키고, 도움을 받아라. 네가 틀릴 가능성도 기록해.”

강만석의 마지막 말이 오래 남았다. 자신이 맞다고 믿는 순간에도 틀릴 가능성을 적어 두는 것. 태준은 메모장 첫 줄로 돌아가 ‘내 판단은 잠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날 저녁, 새벽의 장부 대화방에서 또 하나의 표가 올라왔다.

[참여자 반응 예측] 태준 — 승인 지연 가능성 41% 재혁 — 설득 지속 가능성 73% 윤아 — 개입 가능성 29%

태준은 화면을 보며 숨을 멈췄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과 재혁, 윤아의 움직임까지 숫자로 바꿔 놓았다. 이 방에서 사람은 투자자가 아니라 변수가 되어 있었다.

곧이어 익명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강태준 씨, 당신이 믿는 기록도 누군가의 계산 안에 있습니다.

태준은 대화방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표 전체를 캡처하고, 원본 파일의 시간과 함께 별도 저장했다. 그리고 윤아에게 한 문장을 보냈다.

— 오늘부터는 저도 확률을 기록하겠습니다. 다만 사람을 움직일 확률이 아니라, 누가 책임을 피하려 했는지에 대한 기록으로요.

답장은 한참 뒤에 도착했다.

— 이제야 첫 번째 언어를 배우셨네요.

태준은 창밖의 어두운 상가를 바라봤다. 최미라가 남겼다는 기록은 그 건물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을 찾는 일조차 누군가의 계산에 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상가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내일 아침, 그는 그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돈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 뒤에 가려진 이름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순간, 화면 맨 아래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 다음 확률은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 · ·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