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리비
2화. 마지막 수리비
다음 날 아침, 윤도현은 셔터를 올리기 전에 계단 아래부터 살폈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상가 입구 바닥에 물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그는 가게 문을 열고 가장 먼저 하드디스크가 놓인 작업대를 확인했다. 전원은 꺼져 있었고, 전날 적어 둔 상태표도 그대로였다.
[작업 기록] 접수 시각: 14시 18분 복구 상태: 견적서 1건 확인 주의 사항: 원본 장치 추가 구동 금지
도현은 기록 아래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손글씨가 번지지 않도록 천천히 눌러 썼다. 작은 가게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돈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기록을 건너뛰고, 고객이 재촉한다는 이유로 확인하지 않은 결과를 약속하면, 한 번의 실수가 다음 실수를 불러왔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날 남겨 둔 고객의 전화였다.
“지금 확인할 수 있습니까? 거래처에서 아침 회의 전에 보내 달랍니다.”
“확인 작업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만 원본은 건드리지 않고 복제본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복구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나눠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 열 시까지 가능합니까?”
도현은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지만, 어제의 기록을 떠올리며 숨을 고쳤다.
“파일 목록과 견적서 확인본은 열 시까지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머지 문서는 상태를 확인한 뒤 시간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다 된다는 말은 아니군요.”
“네. 아직은 아닙니다.”
전화를 끊은 도현은 작은 메모지에 약속한 시간을 적었다. 열 시. 보내기로 한 것은 두 가지. 할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면, 자신이 한 말을 눈앞에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복구 장비를 켜고 디스크 복제 상태를 확인했다. 진행률은 어제보다 느리게 올라갔다. 화면 한쪽의 숫자가 멈출 때마다 도현은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데이터 복구는 서두르는 사람의 손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다.
열 시가 되기 십 분 전, 견적서 확인본과 파일 목록을 정리해 고객에게 보냈다. 파일명은 원본과 다르게 바꾸고, 복구 과정에서 확인한 범위와 아직 열지 않은 영역을 구분했다. 고객이 받은 자료만으로 거래처에 보낼 수 있도록 간단한 안내도 덧붙였다.
— 현재 확인된 문서는 견적서 1건입니다. 손상 가능성이 있는 문서는 원본에 추가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오늘 오후까지 1차 결과를 안내드리겠습니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도현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커피 대신 물을 한 잔 마셨다. 어제 받은 첫 수리비는 주머니 안쪽 봉투에 따로 넣어 두었다. 진단비와 작업비를 합쳐도 며칠 치 식비 정도였다. 그 돈으로 부품을 사면 다음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임대료를 생각하면 손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고객이 돌아온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을 연 사람은 낡은 점퍼를 입은 중년 남자였다.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윤도현 씨 맞지?”
“네.”
“김태식이다. 아래 시장에서 부품 가게 한다. 어제 저녁에 세탁소 사장한테 얘기 들었어. 첫 수리 맡았다며?”
도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식은 상자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는 중고 메모리와 케이블, 전원 장치 몇 개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필요하면 봐. 당장 돈은 나중에 받아도 된다.”
도현은 상자 안을 살폈다. 모두 새 제품은 아니었지만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고, 테스트 날짜도 적혀 있었다.
“외상은 어렵습니다.”
“외상이라고 부르면 부담스럽지. 대신 네가 쓰고, 수리비 받으면 그때 계산해.”
“그게 외상입니다.”
“장사를 해 본 사람이 말귀는 빠르군.”
김태식이 웃었다. 도현은 웃지 못했다. 부품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분명 도움이 됐지만, 갚지 못하면 결국 빚이었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필요한 것만 사겠습니다. 아직은 약속할 수 있는 범위를 모르겠습니다.”
김태식은 도현을 한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드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일단 가져가고 나중에 생각하거든. 그런데 장사는 나중이 금방 안 와.”
김태식이 돌아간 뒤 도현은 상자 안의 부품 목록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필요한 부품, 예상 가격, 결제 기한. 그는 작은 표를 만들었다.
[부품 메모] 메모리 2개: 테스트 완료 전원 장치 1개: 팬 소음 확인 필요 케이블 4개: 외관 이상 없음 결제: 수리비 수령 후, 사용분만
표를 만든 뒤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기록하는 일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당장 수리 한 건을 더 받는 편이 돈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기록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빌렸는지, 무엇을 팔았는지, 어디서 손해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가 되자 전날 고객이 다시 찾아왔다.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작업대부터 바라보았다.
“다른 파일은요?”
“복제본에서 확인 중입니다. 지금까지는 문서 세 개가 열렸고, 두 개는 손상 정도가 심합니다.”
“그럼 오늘 안에 다 안 되는 겁니까?”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리해서 파일을 열면 복구되지 않은 부분까지 손상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손을 꽉 쥐었다.
“저는 결과가 필요합니다. 과정 설명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도현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고객에게 과정은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확인된 파일을 먼저 전달하고, 손상된 파일은 복사본에서 복구를 시도하고, 불가능한 부분은 오늘 저녁까지 구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구가 안 되면요?”
“안 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돈은 왜 받습니까?”
도현은 어제와 같은 질문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더 빨리 답하지 않았다.
“파일이 살아났는지 여부와 별개로, 손상된 장치를 안전하게 확인하고 복구를 시도한 작업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처음 설명한 범위를 넘어서는 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 추가 장비가 필요하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작업대의 상태표를 내려다봤다. 종이에는 시간과 확인 내용이 빼곡했다.
“이걸 매번 적습니까?”
“네. 제가 무엇을 했는지 고객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다른 데서는 이런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아직 다른 데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그는 확인된 파일을 받아 들고 돌아갔다. 문이 닫힌 뒤 도현은 자신이 너무 원칙적인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돈이 필요한 때에 돈보다 기록을 앞세우는 것이 과연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 무렵, 도현은 시장 안쪽 부품 가게를 다시 찾았다. 김태식은 작은 라디오를 틀어 놓고 재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 상자에서 전원 장치 하나를 써도 되겠습니까?”
“고객 컴퓨터에?”
“테스트용입니다. 실제 교체는 고객에게 상태와 가격을 설명한 뒤 결정하겠습니다.”
김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다. 부품 바꿔 놓고 나중에 설명하는 사람도 많아.”
“사장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까?”
“나도 옛날에는 했지. 빨리 끝내면 손님이 좋아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빨리 끝낸 만큼 문제가 늦게 돌아오더라.”
김태식은 계산기를 내려놓고 도현에게 작은 수첩을 보여 주었다. 거래처 이름과 날짜, 미수금이 적혀 있었다. 오래된 이름 옆에는 붉은 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돈을 못 받은 거래가 있습니까?”
“있지. 믿고 먼저 보내 줬다가 가게 문 닫은 사람도 있고, 약속을 미룬 사람도 있어. 그래서 나는 요즘 물건보다 약속을 먼저 확인해.”
도현은 수첩의 줄을 보며 아버지 이름이 적힌 독촉장을 떠올렸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대신 갚아야 했다. 그 사실은 사업의 크기와 상관없이 같았다.
그날 밤, 복제본에서 추가로 문서 두 개가 열렸다. 완전한 복구는 아니었지만 거래처 이름과 납기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현은 고객에게 결과를 설명하고, 필요한 내용을 별도 문서로 정리해 보냈다. 남자는 잠시 뒤 전화를 걸어왔다.
“전부는 아니지만 회의는 넘길 수 있겠습니다.”
“다행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받으려는 말만 하는 줄 알았어요.”
“저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안 된다고 먼저 말합니까?”
도현은 작업대 위의 상태표를 보았다.
“나중에 더 큰 비용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웃음이 들렸다.
“내일 잔금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사무실 컴퓨터도 몇 대 있는데, 한번 봐 줄 수 있습니까?”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무실 컴퓨터 몇 대라면 지금보다 큰 일이었다. 부품을 미리 사야 할 수도 있고, 자료를 다루는 책임도 커졌다. 고객을 잃지 않으려면 당장 된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첩을 펼쳐 새 줄을 그었다.
[새 문의] 고객: 전날 자료 복구 의뢰인 요청: 사무실 컴퓨터 점검 확인할 것: 대수, 증상, 자료 보안, 방문 시간 약속: 현장 확인 후 견적
“먼저 상태를 확인한 뒤 가능한 범위와 비용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자료가 있는 컴퓨터라면 백업과 접근 권한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또 확인이군요.”
“네. 확인하지 않으면 제가 무엇을 책임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고 도현은 처음으로 큰 작업이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두려움은 여전히 있었지만,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면 다음 행동을 정할 수 있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집에 오니?”
“네. 조금 늦지만 갈게요.”
“돈은 벌었고?”
도현은 어제 받은 첫 수리비를 떠올렸다. 아직 잔금은 받지 못했고, 오늘 사용한 부품값도 계산해야 했다.
“조금 벌었어요.”
“조금이 어느 정도인데?”
“밥 먹을 수 있는 정도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밥은 집에서 먹어. 네가 번 돈은 네가 먼저 지켜야 한다.”
도현이 집에 도착했을 때 식탁 위에는 된장찌개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국자를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힘드니?”
“아직은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돈이 없다는 뜻이니, 아니면 방법이 있다는 뜻이니?”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작은 통장을 가져왔다. 낡은 고무줄로 묶인 통장이었다.
“이건 네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남겨 둔 돈이다. 전부는 아니고, 당장 필요한 만큼만 쓸 수 있다.”
“안 돼요.”
“왜 안 되니?”
“제가 시작한 일이잖아요. 엄마 돈까지 쓰면 첫날부터 빚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빚은 약속을 안 지키고 숨기는 데서 커진다. 필요한 만큼 빌리고 언제 어떻게 갚을지 적어 두면 된다.”
도현은 통장을 받지 않고 식탁 위에 손을 올렸다.
“가게 보증금과 부품값을 계산해 봤어요. 이번 달을 버티려면 최소한 이백만 원이 필요합니다.”
“그럼 이백만 원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계획인지부터 묻는 거야.”
어머니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도현이 적어 둔 부품값과 임대료가 이미 옮겨져 있었다.
“네 방에서 이걸 봤다. 수리비를 받는 것과 가게를 운영하는 건 다르다. 다음 달에도 같은 돈을 벌 수 있는지, 못 벌면 무엇을 줄일 건지 적어.”
도현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어머니는 통장을 내미는 대신 계산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그날 밤 도현은 식탁에 앉아 계획을 다시 썼다.
첫째, 고객 자료는 복구 가능성과 관계없이 상태를 기록한다. 둘째, 부품은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사용분만 계산한다. 셋째, 현장 확인 전에는 수리 완료를 약속하지 않는다. 넷째, 한 달 고정비를 먼저 확보한 뒤 새 일을 받는다. 다섯째, 어머니에게 빌리는 돈은 금액과 상환일을 적는다.
마지막 줄을 쓴 뒤 그는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돈을 빌리는 순간, 수리점은 취미가 아니라 책임이 된다. 실패하면 자신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빌려 주세요. 대신 매달 얼마를 갚을지 먼저 정하겠습니다.”
어머니는 통장을 건네며 말했다.
“성공하면 갚겠다는 말은 누구나 한다. 성공하지 않아도 갚을 방법을 적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어머니에게 빌릴 금액을 이백만 원으로 정하고 간단한 차용 메모를 작성했다. 상환 시작일과 매달 갚을 금액을 적고, 서명을 받았다. 종이 한 장이었지만 도현에게는 사업자 등록보다 무거운 계약서처럼 느껴졌다.
가게로 돌아온 그는 김태식에게서 빌린 부품 사용 내역을 정리하고, 고객의 잔금 입금 예정일을 표시했다. 장부의 숫자는 여전히 작았다. 하지만 이제 그 작은 숫자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였다.
도현은 빈 벽에 종이를 붙였다.
[이번 달 생존표] 고정비: 임대료, 전기료 변동비: 부품, 교통비 확정 수입: 자료 복구 잔금 예상 수입: 사무실 점검 금지: 확인 전 대량 구매, 무리한 할인, 근거 없는 완료 약속
문을 열자 아침 햇빛이 복도 안으로 들어왔다. 간판 없는 가게는 여전히 초라했고, 다음 고객이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도현은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돈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무엇이 부족한지 적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컴퓨터 고치는 데가 여기 맞습니까?”
도현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네. 어떤 문제가 있으신가요?”
“우리 사무실 컴퓨터가 자꾸 멈춰서요. 여러 대인데, 오늘 안에 봐 줄 수 있습니까?”
도현은 작업대 위의 장부를 바라봤다. 아직 가게에는 정식 간판도, 여유 자금도, 직원도 없었다. 대신 기록과 약속, 그리고 마지막 수리비로 버틴 하루가 있었다.
“먼저 몇 대인지, 어떤 증상인지 확인하겠습니다. 오늘 가능한 범위와 내일 해야 할 일을 나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손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새 접수표를 꺼냈다. 첫 줄에 날짜와 시간을 적고, 고객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수리점의 두 번째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작은 통장 하나와 작은 장부 한 권, 그리고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그의 첫 자본이었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시 만나요.